새벽녘, 한낮, 땅거미 질 무렵, 칠혹의 밤은 거기 그렇게 있으므로 있는 그대로. 더러 가만히 스며들어 가슴을 일렁이게 하던, 가을 들녘의 풀잎에 머문 쇠잔한 볕살과 스치는 바람소리. 병원 영안실 안 촛불이 그림자진 검은 띠를 두른 죽은 이의 사진에 정지한 박제된 시간. 죽은 이가 그린 삶의 자취와 죽음과 살아 있음의 경계.
이와 같은 것에서도 우주의 숨결과 섭리와, 까마득한 예로부터 영겁으로 끊임없이 지속되는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숙연함을 새삼 느낀다. 그러나 돌아서면 그 순간은 마디마다 앙금으로만 남고, 이내 비린내 나는 삶의 현장 곧 미망(迷妄)의 늪에 빠져, 명리(名利)와 이기(利己)의 날을 세워 허덕이며, 표피적인 감각에 쉬이 젖어 버린다.
그래서 그런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시계를 보며 미리 짜여진 틀에 이끌리고 쫓기어 바삐 움직이는 그런 일상의 쳇바퀴에 실려 맴을 돌다 보면, 속되고 고약한 행동거지와 무기력한 타성으로 잇는 순간이 있을 따름, 시간의 의미와 그 충일한 흐름은 물리적인 진동 밖에 더도 아닌 빈 껍질로 빛바래져 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흐르는 시간과 공간의 고리와 인과(因果)에서, 우리 자신은 어디 있으며 또 무엇인가.
“이 세상의 행적(行蹟)은 지나감이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면 지상의 속세간사(俗世間事)에서 빚어지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부질없는 노릇인가. 갈피를 못 잡는 물음과 혼미.
“비구여, 오관(五官)에 지배되는 다섯자의 이 몸뚱아리 속에, 세계와 세계의 생성(生成)과 세계의 소멸과, 해탈에의 길이 죄다 깃들여 있음을 알라”는 불타의 가르침은 “무릇, 삶을 가진 모든 것은 다 이내 가슴 속에 끝없이 간직되어 있도다”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말틴 부버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모든 것에는 다 하느님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 세계를 버린다든지 자기의 집에서 떨어져 나간다든지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나의 바깥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은 ‘존재한다’고 잘라 말할 수도 없다. 아니 그것은 나, 곧 나의 현실의 생활, 나의 결단, 나의 노동, 나의 봉사와 관계하고 또는 그것들에 의존하면서, 지금 여기서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은 내가 이 세상을 긍정하느냐, 안 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요, 나의 혼(魂)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로 말미암아 정해지는 것이다.” 이 말에서도, 기도와 희생과 베풂이라는 소중한 의미를 찾게 될 것도 같다.
그러나 짧은 앎이 언제나 실천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괴리감… 언제나 흘러간 세월은 아쉬움으로 남고, 그러면서도 시선을 달리하면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게 윤색되어 나타나는가.
가끔, 묵은 자료를 뒤적이며 작업의 자취를 정리하다 자신의 낡은 사진을 발견한다. 문득 아스라한 기억의 저편에 떠 있는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 시간들은 아리게 오는 이러저러한 연민의 통증과 함께 있다. 다시 시작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마디. 만약 그 때 이랬으면 어떠했을 것이고, 저랬으면 어떠할 것인가…젊은 날에는 왕성한 의욕과 열정, 신선한 생기와 낭만, 결 고운 순결과 순수라는 어휘와 영롱한 영혼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허기진 갈증을 안고 서성이던 방황과 갈등의 길목에서, 그 때는 빈 것도 넉넉했고 고통마저 기꺼이 삭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길쌈은 회한으로 오는걸 어쩌랴. “젊은 때 아무 것도 모아두지 않은 네가 늙어서 무엇을 찾을 수 있으랴”고 한 성경의 경구(警句)가 아프게 와 닿는다.
경이롭게 움튼 새싹은 비 • 바람과 천둥 • 번개를 견디어 싱그럽게 꽃 피우다가, 새 생명을 예비하듯 조락(凋落)한다. 생겨난 것은 쇠퇴하여 사라지기 마련인게 생명의 순환법칙이고, 나이든다는 것은 자연현상인가 보다. 삶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살아있기 때문에 또한 기쁨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나이를 먹고 노쇠해지면서 그에 걸맞는 원숙함과 분별력을 갖추어가야 할 게 아닌지.
어찌하였든지 시간은 흐르고 하루가 지나면 새날은 밝아온다. 시간의 분절은 의식에 의한 재단(裁斷)이겠지만.
세밑은 대개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춘추(春秋)를 거듭하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더 그렇다. 아마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만드나보다. 단기(檀紀)든, 서기(西紀)든, 불기(佛紀)든, 나이테는 한결씩 더 보태어질 것이니, 새해를 맞으면서는 망념(妄念)된 아집과 교만을 덜어 내어 나이와 그해를 잊어야겠다. 영생(永生)이 어디에 있는가를 더듬어보기를, 그래서 순간에 머물지 말기를, 적어도 그래보겠노라는 다짐을 마음에 새긴다. 다만 감사하며.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속에 걱정이 있으면 기가 꺾인다.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삶의 슬기를 찾고, 미련한 사람이 입은 어리석음을 즐긴다. 낯을 찡그리고 살면 세월이 괴롭고, 마음이 편하면 하루하루가 잔치 기분이다.”
시간의 마디를 만들며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