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추사에 대해 시작하였으니 또 다른 그의 그림인 <불이선란不二禪蘭>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나이 63세(1853) 다시 한번 탄핵을 받아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떠나게 된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먼 곳에 유배된 그의 정치적 역정은 참 어려운 것이긴 하였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작품이 어려운 유배지에서 꽃 피운 것을 보면 후대의 우리로서는 감사할 따름이긴 하다. 아무튼 추사 선생이 북청에서 자신을 시봉하며 먹을 갈아주던 \'달준\'이라는 시동에게 그려준 것이 대표작인 바로 <불이선란不二禪蘭>이다.
추사 김정희는 유난히 난초 그리기를 사랑하였는데, 아마도 그림의 필법이 그가 추구했던 고대 서법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문에도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의 필법으로 그렸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 괴이한 난초 그림은 난초다운 유려하고 부드러운 선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깡마른 가을철 잡풀을 보는 듯한데, 직선적이고 까칠하며 꺽임이 강한 난엽의 모습은 가히 독보적이다. 원래 난초라는 것이 구구절절한 자태와 방안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향과 같이 군자가 지녀야할 부드러운 면모를 보여주는 식물이라서 사군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추사의 난초그림에서는 그런 낭창한 난엽이나 은은한 향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심해진다. 듬성듬성한 마른 잎은 마치 전쟁 통에 시름하던 두보(杜甫 ; 712~770 당나라 때 시인)의 빠진 머리칼 같기도 하고, 한참 약이 오른 늙은 장닭의 벼슬 같기도 하다. 세한도에서도 그러하였듯이 그림에서는 흔하게 사용하는 먹의 농담(濃淡 ; 진하고 담백함)은 잊은 지 오래이며 붓질도 동세가 아주 빠르고 확신에 차 있다. 마치 \'난이란 이런 것이다\'하며 위세를 하듯 기세등등하다. 그리고는 여백에 쓰기를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 20년이 넘어 우연히 그린 것이지만 예사롭지 않다\"며 스스로 만족해하였다.
화면 속 부서지는 듯 까칠한 추사체의 제문과 난초는 묘한 조화를 이끌어 낸다. 가벼운 중에 힘이 있고, 기운이 있는 가운데 해학이 있으니 무심하고 우연히 얻어낸 그의 내공 때문일 것이다. 선禪은 비장한 각오로 시작하는 것이긴 하지만 힘과 각오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끝없는 수행이 쌓여야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결국 찰나 중에 그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며 미소 짓게 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문 닫고 찾으며 또 찾은 곳, 이곳이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이네.
만약 어떤 이가 말하라고 한다면 난 마땅히 유마의 무언으로 사양하리라.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若有人强要爲口實, 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이것은 불이선란도에 추사가 적은 제시題詩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이제야 서법과 고금의 학문을 두루 익힌 후 그 필법으로 난을 치게 되었는데, 마침 그것이 기교에 흐르지 않고 고졸한 맛이 있음을 느꼈던 것이니 그것을 유마의 침묵에 비유하고는 혼자 통쾌해 했던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귀양으로 그는 유학 못지않게 불학佛學에도 심취하였고 초의 선사와 같은 분과 깊이 교류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득의작得意作인 묵란도에 유마거사의 불이법문같이 고급(!) 불자들만이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겹쳐 내 보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