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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중창주이자, 해인사 제3대 조사로 추앙받는 희랑 대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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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해인사 성보박물관 2010년 10월 344호
희랑 스님은 신라 진성여왕 3년 을유乙酉(889)에 거창군 주상면 성기聖基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俗姓은 주씨朱氏이고,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나이 78세 때인 고려광종(7년) 966년 병인년에 입적하신 분이다. (* 한찬석, 합천해인사지. 거창군사편찬위원회 자료>

스님이 태어난 시기는 신라의 하대下代(780~935)에 속하며, 이 시대는 궁예와 견훤을 비롯하여 수없이 일어난 반란으로 통일 신라는 정치적·군사적 통제를 잃고 국가적인 혼돈과 무질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스님이 출가한 해인사는 802년 순응順應 · 이정利貞 스님의 창건이레 이들 스님의 뒤를 이은 결언決言 스님과 현준賢俊 스님(최치원의 친형)의 활약으로 신라 왕실과 밀접히 교류하면서 신라말 화엄종의 중심도량으로 면모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신라 말과 고려 초의 두 왕조에 걸쳐 생존했던 희랑대사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희랑대사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 고려 화엄불교의 대가 균여(917~973)대사의 <균여전> 기록에

“스님은 북악의 법손이다. 옛날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대가가 계셨다. 한분은 관혜공인데 백제 견훤의 복전이 되었고, 한분은 희랑공인데 태조 왕건의 복전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초심 때는 향화를 올리며 서원을 맺었으나 어른이 되어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겠는가!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 더구나 법의 맛을 각기 다르게 받았으니 그 폐단을 없애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였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문을 일컬어 남악이라 하고, 희랑공의 법문을 북악이라 일컬었다....”

‘가야산 해인사 고적’ 사료에
“ ......신라의 말기에 승통 희랑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시면서 ‘화엄신중삼매華嚴神衆三昧’를 얻었을 적에, 고려 태조 왕건이 백제의 왕자 월광月光(?)으로 더불어 싸웠는데, 월광은 미숭산에 있으면서 식량이 넉넉하고 군병이 강하여, 왕건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에 왕건은 해인사에 들어와서 희랑공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백제를 물리칠 방법을 청하자, 희랑공이 ‘용적대군야차왕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백제 월광이 금갑金甲을 입은 신병神兵이 공중에 가득함을 보고 두려워 항복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희랑 스님을 공경하여 받들면서 전지田地 오백결五百結을 드리니 스님은 옛 사우寺宇를 새로 중건하였다. …”

지리적으로 해인사는 후백제에서 신라에 이르는 중간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사적 전략의 요충지대에 놓여 있었고, 해인사와 멀지 않은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일대전투를 벌인 왕건은 휘하의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 많은 장수들을 잃고 패배하였으며 자신도 겨우 사지死地에서 탈출하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목숨이 위급한 것은 물론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았던 심복인 신숭겸과 장수들을 잃은 정신적인 허탈감을 떨칠 수 없었던 왕건은 희랑스님에게 귀의하여 용기와 각오를 돈독하게 다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화엄학에 있어 북악파의 대표였던 희랑스님은 왕건의 존사尊師와 복전이 되어 고려 건국을 돕게 되었고, 국가적인 신임과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크게 중창하고 화엄학을 크게 융성케 하였으며 이적異蹟을 많이 남기신 고승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 희랑스님이 큰 명성을 대변하는 최치원의 시
‘贈希朗和尙 증희랑화상’ 6편이 남아 있는데

<제1편>에
보득금강지상설步得金剛地上說 금강 같은 참다운 지혜의 말씀 모아
부살철위산간결扶薩鐵圍山間結 미륵보살이 철위산에서 대승경을 결집했네
필추해인사강경苾蒭海印寺講經 필추가 해인사에서 경전을 강하니
잡화종차성삼절雜花從此成三絶 잡화가 이로부터 삼절을 이루리. (이하 5편은 생략)

이 시에서 최치원은 희랑 대사를 용수보살이나 문수보살에 비겼는가 하면, 하늘이 우리나라를 교화 시키려 보냈다거나, 부처님으로까지 비견하고 있다. 또한 해인사에 화엄경을 강의하여 화엄종을 크게 떨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머문 때는 아마도 900년경 이후 이었을 것이므로 희랑대사는 이 당시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어서 10세기 중에는 북악파의 조사로 추대되었을 것이며 아울러 해인사 개산조 순응. 이정 조사의 제1.2대 조사에 이어 해인사의 제3대 조사로 추앙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탁기兪拓基의 <유가야기游伽倻記>에는
희랑 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 태조 왕건은 광종에게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첫머리에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보호와 지켜 주심에 힘입은 것이다(일왈아국가대업一曰我國家大業 필자제불호위지력必資諸佛護衛之力)’라고 천명하면서 불교에 대한 귀의와 신봉을 후대에 부촉하였으며, 희랑 스님이 입적한 후에 광종은 즉위년(949년 기유 오월)에 희랑 스님에게 ‘해인존사원융무애부동상적연기상유조양시조대지존자海印尊師圓融無碍不動常寂緣起相由照揚始祖大智尊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여기에는 해인사로 출가하여 거주하면서 신라말에는 승통으로 주지하였으며, 고려초에는 왕의 존사로서 건국에 일조하였고, 화엄과 선을 원만하게 포융하면서도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화엄종찰인 해인사를 중창하였고,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가적인 숭상과 후원을 받아 제세濟世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여 화엄의 사상을 빛낸 조사라는 희랑스님의 업적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