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지 이제 갓 6개월
에 접어들었습니다. 갓 입사한 신입아나운서가 야무
진 주인의식으로 똘똘 뭉쳐 시작한 프로그램이죠. 이
러저러한 사정으로 장장 한 시간을 단독으로 진행하
게 된 지도 벌써 2개월째네요. 남들이 흔히 말하는 말
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일언一言에 일희
일비하기 일쑤입니다. 6개월이 흐르는 동안 즐거운 순
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한 손에 꼽게 되
는 것 같습니다. 신입, 초보, 새내기라는 딱지를 떼기
까지는 수많은 일비一悲들이 쌓여야겠죠.
라디오 생방송 중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원고
에 전화연결 할 칼럼니스트 분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
는 겁니다. 매주 같은 시간에 연결하는 명사였는데
도 이름이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아 이름소개 없이
‘ 안녕하세요’라고 질문을 시작해버렸습니다.‘코너
가 끝나면서 이름을 언급하니 별 문제 없겠지’라는 생
각이었건만, 스튜디오 밖에서 PD선배가 이름을 소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언급 하라는 주문이 들어
왔습니다. 잠깐 선배 목소리에 집중하다 생방송 중에
2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방송에
서의 시간은 일상생활에서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특
히 라디오의 경우 소리만 들리기 때문에 3초만 조용해
도 듣는 사람이 불안해집니다. 저에게 스튜디오 안은
대한민국 속의 작은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서 제 실수는 저만의 실수가 아니기에 그 충격의 강도
도 3배, 4배가 됩니다. 선배의 주문을 듣고 다급하게
“ 제가 까먹고 소개를 못해드렸는데요…”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음과 동시에 밀려오는 후회의 무게가 아직도
아찔하게 머리를 무겁게 하네요.
‘까먹고’는 방송에 적절하지 못한 단어입니다. 청취
자들에게 진행자로서의 신뢰를 그야말로‘까먹을’만
한 일이었죠. 돌이켜 생각해봐도 제가 왜 그랬을까 싶
네요. 그런데 문제는 방송이 끝나고 스튜디오를 나오
면서 분명 잘못한 것을 알겠건만 이를 어찌 바꿔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삼사일언하지 못했으니 일언
삼사라도 하고자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던 차에 부장님
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잘못된 표현을 썼다는 꾸지람
이었습니다. 연거푸“잘못했습니다”를 외치다 이때
다 싶어 어떻게 말했어야 올바른 표현이었을 지를 여
쭤봤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그 말은 안 해도 되는 말인
데 왜 했냐는 꾸중 뿐 해법은 주지 않으셨지요.
“깜빡 잊었습니다”는 문맥상 만점짜리 답안은 아닌
듯 하고,“잊어버리는 바람에요”도 100% 흡족하지 않
았습니다. 결국 까먹다와 대등한 의미를 찾는 게 아닌
아예 의미를 되짚는 과정에서“실수로 말씀드리지 못
하고 진행하였습니다”라는 저만의 정답을 만들었습니
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
다. 삼사일언 중 세 번의 생각 가운데 한 번 정도 틀
에 박히거나 당연한 생각의 가지에서 벗어나서 전환
된 아이디어를 펼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생각의 속도가 얼마나 빨라야 생방송의
부담 속에서도 여유를 가지고서 세 번을 생각한 후 말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타고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
다. 학창시절에는 천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
데 요즘은 달변가에 대한 어마어마한 질투심이 생기
곤 합니다. 하지만 해인지 독자 여러분도 달변가가 부
럽다고 느낀 적은 있겠지만 존경한 적은 없으시겠죠.
단지 말실수 없이 끊임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되기도 힘들겠지만 목표하고 싶지도 않
습니다. 저에게 방송국에 몸담게 된 삶에서 단 하나
의 목표만을 꼽으라면, 내 방송을 본 시청자 중 단 한
명에게라도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직
은 한 번 내뱉고는 후회함을 가득 앉고 세 번 곱씹어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세 번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생
각의 속도를, 한 마디의 말에도 삼사三思의 깊이를 담
을 수 있겠죠.
매일 생방송인 라디오다 보니 원고는 방송시간이
채 20분도 남지 않은 시간에 나오기가 다반사입니다.
재빠르게 갓 인쇄된 따뜻한 원고를 받아들고 문어체에
가까운 원고를 제 입맛에 맞는 입말로 고쳐 쓰다 보면
한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구간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마무리’
간결하고도 강력한 이 한 줄. 어떻게 하면 내용을 짧
게 정리하면서 청취자들이 인상 깊게 기억할 수 있을
까를 고민하다보면 어느새 방송시간 임박에 헐레벌
떡 뛰어가곤 합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취재내용
을 듣고 리포터와 이야기를 나누며 마무리할 말들이
금방금방 떠오를 때도 있지만 매일 매일이 내 마음대
로 되진 않죠.“네. 오늘소식 잘 들었습니다. ○○○
리포터 수고했습니다”로‘마무리’하고나면 허무하
고 허탈한 느낌,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
를 감정입니다.
사실 지금도 어제 마무리라고 적어두고는 고민의 고
민을 거듭하다 그냥 덮어버린 원고지를 다시 펼친 건데
요,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멋진 마무리를 위해서는
삼사가 아닌 오사, 육사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