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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길 떠나는 나그네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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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황청원 1988년 01월 71호
불이(不二),
한 해가 접히면 어김없이 한 해가 시작됩니다. 마치 비어있는 겨울산을 향해 던진 목소리가 아주 성성한 메아리되어 휘파람소리로 돌아오듯 말입니다.
산에, 이 청명한 산 속에 살면 그렇게 한해가 마감되고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을 눈부시게 목격할 수 있읍니다. 산의 품 속에 살아있는 것들은 무엇 하나 순수하지 않은 것들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산에 머물다 보면 조금이라도 가식된 언어나 행위들은 금방 부끄러움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대도 혹시 우리가 엮어가는 삶의 그물들이 가식 되지않은 언어나 행위로 짜여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참된 기쁨이라 불리워 져도 당연한 일임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의 삶 가운데 진실된 언어나 행위는 가장 진수(眞髓)의 뿌리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것들을 생소함의 그릇에 담긴 회귀한 물건들로 인식하게 되고 말았읍니다.
순수의 언어나 행위, 우리들 곁에서 천천히 소멸되어 정말 이제는 오염된 강물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찾는 만큼이나 어려워진 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우들이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쌓은, 언젠가 작은 풀꽃씨 하나라도 자리잡지 못할 폐허의 언덕인 것입니다.
그대나 나도 어느 때인가 폐허가 될 이 언덕에 무상하게 지어진 집에 불파하다 말할 수 있읍니다. 그냥 쉽게 집을 옮겨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도 누구에게나 그 생각을 향해 질타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집을 안온한 땅에 옳겨 짓기 전에 폐허가 될 언덕을 새롭게 가꿔보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더욱 필요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순수의 언어나 행위가 불멸의 꽃처럼 피어있는 땅, 어쩌면 정토(淨土)를 일컫는지도 모릅니다. 진실의 언어나 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을 정토라고 한다면 분명 지금 우리는 그와 상반된 땅에서 자신들의 생을 비춰 보며 존재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존재하고 있는 땅의 순수한 언어 행위의 꽃들은 점점 시들어가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언어 행위가 결여된 우리라면 정토에 머물지 못하고 진흙수렁에서 허덕이는 아메바로 생을 접는다고 하더라도 그리 큰 안타까움을 누릴 권리를 가질 수 없읍니다.
내가 그대에게 이 한 해의 시작과 함께 두서없이 건네고 있는 순수의 언어 행위에 대한 궤변들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해 건네는, 조금은 어리석기도 하고, 또 조금은 현명하기도 한 질문 들입니다. 질문을 건네는 마음은 그저 무성했던 잎들 다 떨쳐 버리고 빈 가지나 어우르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착잡함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석가불께서 언어나 행위를 좇는 수행자가 아닌, 마음과 거울의 먼지를 닦아내는 수행자 되길 가르침으로 하셨지만 중생 세계는 언어나 행위들이 베 짜는 씨줄과 날줄과 같아, 그것을 멀리하고는 삶의 그물들을 짜낼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중생들이 머무는 사바세계의 안과 밖은 순수 언어 행위의 결여로 인하여 우뭐 삶의 틈새마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범벅되어 때로는 밝음으로, 때로는 어둠으로 각양각색의 꽃들이 되어 우리들 곁에 만개(滿開) 했음을 그대도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만개한 꽃들을 응시하며, 또는 꺾으며 석가불의 염화미소(拈花微笑) 처럼 어떤 자세의 미소로 여기 이렇게 머물렀는지 우리 모두의 내면을 열린 석류 속 들여다보듯 볼 수 있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이 곳 산 안에도 순수의 언어 행위를 본분으로 지켜야 할 수행하는 이들이 발을 헛딛은 채, 보이는 세계만을 쫓는 경우도 많았읍니다. 중생을 떠나 부처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진솔한 중생됨도 거부하고 부처도 이루지 못하는 위치에서 뜬구름처럼 무의미한 치우침만을 보여 주는 이들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중도(中道)라는 석가불의 말씀도 있읍니다.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고 바른 생각으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서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세간에 사는 이들도 이 말씀을 좇아 생을 꾸려간다면 반드시 생의 빛깔이 섬광(閃光) 같은 눈부심을 보여줄 것이 확실한데, 하물며 나와 동행하는 일부 수행자들은 석가불의 말씀 좇음도 잊어버리고 세상 밖에 자기 내걸어 줄 이들과 손잡고 참다운 마음으로 중생 곁에 머무르는 일을 소홀히하니, 가시덩굴 사이에 손 집어 넣은 듯한 고통이 아립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자리(自利)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다른 무엇을 위해 타리(他利)도 이뤄 내지 못할 그들은 결국 시은(施恩)만을 축내고, 내생엔 뉘집 우마(牛馬)로 태어날 것이 확연합니다.
정치적인 문제에도, 누가 원만하여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누구는 원만치 못하여 나라 이끄는 자 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중도도 저버렸고,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사명감없이 불교의 대중화를 지칭하며 막연함으로 다가서서 부처님 말씀이 담긴 그릇들을 깨뜨리며 불일(佛日)을 훼(毁)하는 이들도 있었읍니다. 이들은 몇몇 소수이지만 그들이 어느 자리에서나 우리 불교 전체의 얼굴을 표방하고 있음을 중요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불교가 산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나 물 흘러가듯 역행하지 않고 소리없는 깨끗함을 지니고 사회의 깊숙한 곳으로 흘러가 급조(急造)되지 않은 맑음들을 차츰 건네 주어서 투명한 세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의 답습처럼 그들의 뒤를 좇아 근간(根幹)도 잃은 채 허둥거린다면 단단했던 뿌리도 병들고 무성했던 잎들도 말라 보잘 것 없이 보기 흉한 고사목에 지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산 안에는 진리의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와 살을 깎으며 고행으로 정진하는 눈 푸른 납자(衲子)들이 앉을 자리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들보다 훨씬 많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가 분별없이 산 안의 부끄러움의 일부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것도 깨달음의 세계에 가까와 있는 눈 푸른 수행자들에게 등 기댈 수 있는 까닭이요, 그들을 중심으로한 불교의 미래는 밝음이 넘쳐지게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끊임없이 상실되어가는 순수의 언어나 행위들을 무수히 채집해내야 합니다. 그들 몸 속을 흐르는 청동빛의 핏속에서, 어떤 부질없는 것들도 받아들이는 자비로운 눈빛에서, 무명을 거두어 줄 한량없는 지혜의 정신 속에서 순수의 언어 행위들은 선명하게 생성되어 가고 있어서 입니다.
그대가 살고 있는 거기, 산 밖의 모습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혼탁한 기류를 따라 흐르며 자신의 안위에 젖어 부드러운 곳에나 머무르기 위해 옳음을 거부하는 이들과 여러 이웃들의 세상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소박한 그릇이라도 되고자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겠지요.
사람은 어떤 의미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문득 그 의미를 단절시키는 다른 의미가 나타나면 그것에 섭렵되어 버리고 말겠지만. 그러나 생을 비워가는 동안 그름의 의미(非)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는 옳음의 의미(是)에 사로잡혀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나는 가끔 세상사는 이들의 생각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자유로운 물고기가 되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수로(水路)처럼 놓인, 옳고 그름의 길들을 인지(認知)하여 순수의 언어나 행위의 땅에 이를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읍니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인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한 것들은 누구의 가르침을 통해 얻어내는 것보다는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들의 세계에 다
가가 끝내 그것의 일부로 남으며 체득해 냄이 가장 절실한 경우가 된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 나의 잘못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단정해 봅니다.
불이,
그대 마음을 모아 주위의 이웃들에게 꽃 한송이 건넬 수 있길 빕니다. 순수의 언어나 행위를 위해 바쳐질 수 있는 그런 꽃이라면 더욱 좋겠읍니다. 한 해를 접고 또 한 해를 펴면서 여기 승(僧)과 거기 속(俗)을 잇고 있는 우리 인연의 끈들이 훨씬 두터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꽃들도 되겠지요. 우리는 서로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모두들에게 항상 순수의 언어나 행위가 무성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이제 그대와 나, 아니 우리 모두가 순수한 언어나 행위를 찾아 길 떠나는 나그네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라는 나무들이 새벽 숲 속의 나무처럼 눈부실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새해가 열리고, 그대의 모든 것들도 아름답게 열리게 될 것을 기원하며 부처님전에 좌정하고 무릎 시림으로 두서없는 마음 전합니다.

무진년 새해 아침
삼각산 허리의 달빛 가득한 집에서
황 청원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