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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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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최근영┃KBS 한국방송 프로듀서 2010년 10월 344호
2년 전의 일이다. 출장을 갔다 왔더니 집에 있던 정수기가 새 것으로 교체되어있었다. 어머니말씀이 정수기가 오래 되서 새것으로 무료로 교체해 준 것이고 정수기 점검하러 오는 코디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조치를 해주었다고 했다. 몇 달 후 무심코 정수기 청구서를 보게 되었는데 이전보다 오른 금액이었다. 무료교체라는 말과 달라서 여차저차 확인해보니 무료교체가 아니라 업그레이드였다. 상황을 잘 모르는 어머니에게는 무료로 교체해 준다고 생색을 내놓고 사실은 좀 더 비싼 정수기로 교체한 것이다. 알아보니 무료교체품목도 있었는데 실적을 높이려고 꼼수를 쓴 것이다.
“정수기 회사가 이익을 위해 나이 드신 어머니를 속였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 정수기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당사자인 코디의 전화번호도 알아냈다. 나는 코디에게 당신은 부모가 없느냐, 누가 당신 부모를 그렇게 속이면 좋겠냐고 퍼부어댔다. 화가 폭발하여 지점장을 바꾸라고 하고 지점장에게도 한바탕 쏟아 부었는데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본사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담원에게 또 일일이 상황을 얘기하고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따졌다. 그쪽의 반응은 일단 출고된 정수기는 다시 환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본사에서 해결해 줄 수 없고 확인을 제대로 안 하고 계약한 책임도 있으니 지점에서 잘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무덤덤한 반응에 더 화가 났다. 나는 며칠 후 정수기 대리점까지 달려가서 코디아줌마와 지점장을 직접 만났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내가 옳고 저들은 늙은 어머니를 상대로 비열한 꼼수를 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이 전혀 풀리지 않았다. 내가 옳고 저들은 그르다는 확신이 자제력을 잃게 했다. 지점장과 코디는 죄송하다고 계속 사과했지만 나의 화는 계속 핑계거리를 찾으며 자신의 에너지를 더 활활 타오르게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는 당장 새 정수기를 환수해 가라고 하고 그동안 과다 청구된 금액도 환불해달라고 요구했다. 그쪽에서는 새 정수기를 환수하면 일단 설치된 정수기를 다시 판매할 수 없으므로 많은 비용이 소요되니 조금만 양해를 해주면 좋겠다고 사정을 했다. 그 때문에 또 화가 났다. 여차저차 하다가 결국 코디아줌마가 그 비용을 책임지기로 하고 정수기를 수거해가기로 결정이 되었다. 나는 다시는 그쪽 제품은 쓰지 않겠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해주고는 그곳을 나왔다.
그렇게 해결이 되어서 속이 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몰아치고 나니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졸지에 많은 비용을 떠안게 된 코디아줌마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화를 잘 내지 않고 무던하고 너그럽다고 하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며칠간 내가 내뱉은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니 내 자아상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나의 말과 행동을 잘 관찰해보니 나는 내게 이익이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착하고 예의바르다. 왜냐하면 손해가 날까 두렵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상대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고 내 이익에 봉사하도록 잘 유도한다. 만약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별로 화를 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 사람이 내게 쓸모가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든 계산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재빠르게 실행되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착하다”고 위장하고 쓰고 있는 가면은 사실은 “탐욕”이었다. 그리고 그 탐욕은 언제든 성냄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정수기코디나 상담원 같은 사람에게 나는 전혀 “착하고 예의바른”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라면 마음껏 성질을 부려도 안 보면 그만이니 내 평판이나 이미지를 실추시킬 염려가 없다고 이미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계산을 딱 끝내놓고 보니 가면을 벗어던진 나의 에고가 거침없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나를 “재수 없게 걸린 성질 더러운 놈”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찬찬히 그때 나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면 “쪼잔 하고 구질구질하고 난폭하기” 짝이 없다. 한 달에 고작 몇 천원을 더 내면 되는 정수기 업그레이드를 가지고 노모를 속였다느니 거대기업의 사기라느니, 소비자 우롱이라느니 주워섬긴 말들이 참으로 거창하다. 평소에 자신의 이익 때문에 억압되어 있던 악하고 불건전한 성향이 작은 물꼬를 만나 댐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당시 나는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 자체가 비뚤어져 있었다. 일이 안 풀리고 압박감이 가중되니 어딘가 그것을 풀어버릴 희생양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삼사일언”이라니 내 인생에 세 번 생각해 보고 나온 말이 몇 마디나 있을까. 오늘 하루만 돌아보더라도 세 번 생각하기는커녕 언제 시작했는 줄도 모르고 말하고 있거나 이미 말해놓고 무슨 말 했는지 금방 까먹었거나 내가 했는지 네가 했는지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도 모를 말들을 여기저기서 주워다 섬기고 있다.
여러 번, 아니 수십 번 생각해 보고 하는 말들이 있기는 있다. 대개가 어떻게 말을 해야 더 이익을 보고 손해를 안 볼까 하는 것들이다. 이해타산이 있으면 그제서야 말을 고르기 시작한다.
얼마전 맛지마니까야를 읽다가 부처님께서 아들 라훌라를 가르치시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들 라훌라에게 말과 행동, 생각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세 번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말을 하기 전에 이 말이 나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착하고 건전한 말인가 아니면 나와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하고 불건전한 말인가를 생각해보라.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이 말이 나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착하고 건전한 말인가 아니면 나와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하고 불건전한 말인가를 생각해보라. 말을 마치고 난 후에 이 말이 나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착하고 건전한 말인가 아니면 나와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하고 불건전한 말인가를 생각해보라.”
세세생생 내가 입으로 지은 업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니 말하기 전에 항상 “일시정지” 버튼! 이 말은 나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착하고 건전한 말인가 아니면 나와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하고 불건전한 말인가? 세 번은 말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