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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문제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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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오덕 1988년 01월 71호
나는 지금 보통의 신문지 크기의 광고지에서 ‘엄마! 보고싶어요’ 란 커다란 글자 밑에 나와 있는 수많은 귀여운 아기들의 얼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이들 사진 한쪽에, 그리고 사진 뒷쪽 전면에 어떤 상품 광고가 나와 있는 이 ‘미아 자료’는 한국인명구조봉사단이 제공한 것으로, 어느 도시 길거리에서 받아온 것이다.
이걸 받아서 나는 그냥 슬쩍 보고 내버릴 수 없어 집에까지 가져왔다. 아이들을 세어 보니 126명이다. 이 많은 아이들이 모두 부모를 잃어 버렸구나! 그런데 참, 어느 분의 말에 우리나라 미아가 1년에 5만이 나온다던가 했지. 엄청난 수자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그 몇 백분의 1밖에 안 되는 셈이다. 실로 기가 막힐 일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태반이 부모가 일부러 자식을 버린 것이라고 한다. 이쯤되면 사람이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또 진찌 아기들을 잃어 버리고서 애를 태우는 경우도 모두 부모의 잘못이다. 집안에만 갇혀 있다가 밖에 나가면 아이들은 어디고 자꾸 걸어다니고 싶어한다.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건 병신 아이다. 나는 흔히 기차 안에서 두세 살의 아기들이 통로를 마구 뛰어다니면서 좋아하는 것을 보는데, 그럴 때 부모들은 대체로 너무 방심한다. 출입문 가까이 가도 부모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시장에서 사람들 사이를 마구 누비면서 다니는 아기를 내버려 두고는 가게에 들어가 물건 살피기에 정신을 잃은 어머니도 더러 볼 수 있다. 모두 아기를 기를 자격이 없는 어머니들이다. 이런 어머니들일수록 아이가 자라나 학교에 갔다 오면 오늘은 몇 점 받았느냐, 어서 학원에 가거라, 숙제를 해라 하여 아이를 잡는다.
그러나 내가 지금 사진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고 있는 것은, 이 많은 아이들의 얼굴 표정에서다. 어쩌다가 웃는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그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사진을 찍는다니까 그 순간 약간의 호기심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거의 모든 아이들의 얼굴에 아이다운 밝음을 찾을 수 없고, 어두운 근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더러는 넋을 잃은 듯 멍하니 바라보고, 울고 있는 아이도 있다. 이 아이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한없이 우울해지고, 끝없는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귀여운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음이 이렇게 되다니!
얼마 전 동화작가 권 정생 선생을 만났더니, 2차대전 때 나치 집단학살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이들을 영화로 봤다면서 “그아이들이 글쎄, 트럭에 실려 가면서 장난치고 웃고 하잖아요!”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이들 세계의 기막힌 진실을 새삼 느꼈다. 그렇다! 아이들은 아무리 슬프고 답답해도 그것을 오래 지탱해 가지고 있지 못한다. 곧 잊어버린다. 그래서 순간 순간을 살아간다. 아이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다만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 연약한 몸과 마음은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슬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못한다. 집단학살 수용소에 가면서도 웃고 장난치는 아이들! 그것이 아이들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아이들 얼굴은 어떤가! 이 슬픔에 찬 아이들의 얼굴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얼마나 큰 슬픔이, 아픔이 짓누르고 있기에 이런 얼굴들인가! 이런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경제성장이고, 복지사회 건설이고, 문예부흥이고 다 무슨 수작인가.
부산에서 국민학교 4학년 아이가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은 일이 지지난 해 4월이었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사람의 아이가 자살을 하는 수도 있구나, 사람의 아이가 자살을 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싶어 여간 놀란 게 아니다. 아이가 차에 치어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맞아죽고, 병들어 죽고하는 일은 수없이 일어났지만, 아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이야기는 내 평생에 처음 들었다. 동서고금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고, 소설에서도 읽은 일이 없다. 오직 희망밖에는 가진 것이 없고, 현재만을 살고 있는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어디 이럴 수가 있는가? 인간이 어째서 이 지경으로 되었는가?
그런데, 그 해 6월에 나온 어느 잡지에는 자살한 세 아이의 어머니가 쓴 수기가 실려 있었고, 그 이후 아이가 자살했다는 신문 기사를 가끔 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자살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그 생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이 땅덩이 위에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뒤로 이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진 때와 곳이 또 있었던가?
지난 10월 26일, 서울에서 5학년 아이가 자살한 사건을 잠시 생각해 보자. 그 죽은 아이는 중학생 정도 되는 나이의 아이들한테 돈 3만 5천원을 때앗기고 “너 이 새끼, 부모한테 알리면 죽여버린다”는 협박을 당했다. 아침 저녁 학교에 가고 오는 골목길에서 만나야 하는 그 깡패 아이들은 부모보다 더 큰 힘으로 이 아이를 압도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사이 그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이 없어 죽음으로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아이들에게 맞아죽는 것이 두려웠다면 왜 스스로 죽었는가? 죽을 각오였다면 그 아이들이 어째서 두려웠겠는가? 죽음이 두려워서 죽음을 택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깡패 아이들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 스스로 죽음으로서, 그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돈을 빼앗고 협박한 아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와 선생님들과 세상의 모든 어른들과 하느님에게까지 가장 강한 항의와 호소를 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그 아이는 자살이란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죽음으로 표현한 그 아이의 호소와 항의를 이 땅의 어른들은 과연 어떻게 얼마나 받아들였던가? 신문에는 단 한번 조그만 기사 거리로 다뤄지고 지나가 버렸다. 이땅에는 교육자란 이름이 불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교육을 논하고 연구하는 학자도 적지 않게 있고,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도 많건만, 아무도 이 문제를 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들은 채찍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아이들에게 점수를 많이 따라고 으름장을 놓을 뿐이다.
아이들이 서로 뺏고 빼앗기고 하는 참담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면서, 그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게 하여 스스로 죽음의 골짜기로 달려가도록 몰아넣고는, 그 엄청난 범죄 사실에 대해 책임을 질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는 어른들, 미숙하고 미개한 이 동물들!
말을 못하게 했다면 글이라도 정직하게 쓸 수 있게 해야 될 것 아닌가? 그 아이가 만약, 날마다 썼을 것 같은 일기에다가 그 사실을 솔직하게 적어 두었더라도 결코 죽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그 아이가 일기에도 그 사실을 쓰지 못한 까닭은, 학교에서 쓰는 ‘글짓기’고 집에서 써야 하는 일기란 것이 거짓을 꾸며 쓰는 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누구보다도 학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정직한 자기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지도가 그 아이들의 생명을 시들어 죽게 하고 짓밟아 죽게 하는 엄청난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하겠고, 그런 결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올해 들어 또 서울의 어느 여고생이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그 죽은 여고생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작년에도 한 학생이 자살했다고 한다. 모두 성적이 나쁜 것을 비관해서 죽었다. 들으니 미국의 어느 명문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는 그 학교의 교장이란 사람이 평쇼 학생들에게 시험 성적을 올리도록 독려하는 말로 “너희들 죽자사자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의 화장실에 가서 붙더라도 서울대학교에 붙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저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그런 놈은 사형을 시켜야 돼!” 아, 어째서 내 입에서 이런 기막힌 말이 나오게 되었는가!
며철 전 경남 어느 곳에 갔다가 그곳 어느 국민학교 2학년 아이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2학년이면 일곱살이다. 그런 어린애가 죽다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내가 어디서 살인교육이란 말을 했더니 신문사에서 너무 지나친 말이라고 해서 고쳐 보도한 일이 있다. 우리가 해 온것이 살인교육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푼의 에누리도 없는 정확한 말이 살인교육이다.
어찌 살인교육에 그칠까? 점수 따기를 서로 죽을판 살판 경쟁으로 하게 하고, 서로 증오하게 하고, 적이 되게 하고, 남을 끌어내려서 짓밟고 올라서도록 하게 하는 교육,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도록 하는 식인교육이다.
아이들을 잡아족치고, 서로 잡아먹게하는 교육을 하면서도 어른들은 그것을 미화하고 있다. 눈이 멀었는지, 알고도 모른 척하는지, 이 땅의 타락한 어른들은 운동장에 뛰노는 아이들을 먼 발치로 바라보면서 꿈의 나라에서 자라나는 아름다운 ‘꿈나무’ 라고 말하고 있다. 가스 학살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이들이 장난치고 웃는 것을 보고 천당 가는 아이라고 말하듯이!
내일이 대통령 선거날이다. 표를 제법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몇 분 후보자들의 얼굴 사진이 거리와 골목의 담벼락마다 도배를 하다시피 해 놓았는데, 그 가운데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 어느 후보에도 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을 가진 분이란 인상을 보이려 함이겠지. 그런데 대통령 후보 가운데 어느 사람도 교육 문제를 시원스럽게 풀어 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교육 문제엔 아예 언급도 안 했다. 농민 • 노동자 • 공무원 • 상인 • 기업인 • 군인…모든 직업,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온갖 풍성한 앞날을 약속하면서도 가엾은 아이들을 살리겠다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어 선전하면서도 말이다.
물론 그 중의 한 분이 교육 문제의 핵심을 잡아 그것을 풀어 보겠다고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분의 경우에도 내가 보기로는 교육 분야가 다른 모든 정책 분야보다 가볍게 다뤄지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어쨌든 내일 뽑히는 새 대통령은 아이들 얼굴 팔아 대통령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부디 아이들 문제 좀 공부를 해서라도 깊이 알아서, 아이들 편에 서는 의로운 대통령이 되었으면 싶다. 그래서 살인교육, 식인교육의 질서를 깨끗이 무너뜨리고 새로운 인간교육의 질서를 세워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