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 종철 법우에게 -1주년을 맞이하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편집실
1988년 01월 71호
잔혹한 겨울입니다. 반역의 겨울입니다. 예견된 겨울이기는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맞이하고 보니 눈물과 원통함은 모두의 숨소리를 짓밟고도 그칠 줄을 모릅니다. 그래도 어김없이 새해 새날은 병든 걸음으로 모두의 눈썹 밑에 찾아왔고 새벽까치 소리로 넘겨진 새 달력의 수자 배열은 우리에게 더 많은 희생과 눈물을 강요하는 듯 먹빛으로 서 있읍니다.
우리에게는 언제쯤 진정한 의미의 새해 새날이 찾아올는지. 우리는 언제쯤 당신의 젯상 앞에 기쁜소식의 향불을 피워 올릴 수 있을는지.
법우님이 가신 지 벌써 I년이 지났읍니다. 그러나 아직 그대를 위한 천도제 하나 마련하지 못한 이 땅의 숙명은 그대 죽음처럼 아픈 현실입니다. 살아 있음 조차 부끄러움입니다.
그대도 보았겠지요. 작년 6월의 항쟁과 노동자들의 외침들을.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 당신에게 한열이를 보냈고 노동자 이 석규를 보냈읍니다. 이러한 숭고한 죽음은 결국 우리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주었지마는 거기에 비례한 생명의 잃음은 큰 쓰라림이었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아픔은 그대와 그대의 뒤를 따라간 사람들이 죽음으로 이루어 놓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
와 확신이 모든 역량들의 분산과 좌절로 바뀜을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천추의 한으로 남습니다. 또한 그 한은 그대 향한 우리 배반의 위선이기도 합니다.
작년 12월의 선거는 우리에게는 모든 역량을 직결시켜 민주주의의 길목을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을, 그대로 알고 있었을 테지요. 그러나, 선거 이전에 민주세력은 정치인의 선호에 따른 지지와 노선의 차이로 사분오열되었읍니다. 선거전의 이러한 분열은 결국 단일화 조정의 실패를 가져왔고 정치지도자들에게 오판과 망동의 길을 걷게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선거의 결과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우리에게 주고 말았읍니다. 물론 선거 후에 끊임없이 보도되는 부정선거, 선거 무효 선언 등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는 있지만, 병이 든 후의 약방문이 어찌 건강할 때와 같겠읍니까.
사람들은 양 김씨가 이번 선거 결과를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술집에서, 거리에서 소리높여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양 김씨에게만 책임 전가시킬 수 있겠읍니까. 어차피 그들은 민주 세력의 중심도 아니었고, 기존의 보수 정당도 민주 세력의 핵심처는 아니었읍니다. 또한 그들의 한계점을 누구보다도 오늘의 민주 세력은 여실히 잘 알고 있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장난에 불과한 비판적 지지니 정책대결 운운하여 그들의 속성을 감춰 주었읍니다(선거의 기본 전략을 방기한 채). 정당한 협의 없이 개인의 선호에 빠져 분열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선거의 결과는 당연한 귀결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원천적 책임은 양 김씨에 있음이 아니라 오늘의 민주 세력이 공동으로 받아 마셔야 할 숙명의 잔입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앞에서, 모든 민중앞에서 참회하여야 할 일입니다. 민중과 맺은 무언의 약속을 파기한 우리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끊임없는 희생으로 되살려 놓아야만 합니다.
종철 법우님!
다시 한번 우리는 당신앞에 대죄(大罪)를 범하였읍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온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당신의 참혹한 죽음을 잊어 버렸고, 당신의 49재날 당신께 약속한 언어들을 죽여 버렸읍니다. 모든 국민의 배신에서 오는 분노의 얼굴로 타오르는 지금, 당신은 구천의 어둠 속에서 얼마나 큰 고통과 분노의 몸부림으로 떨고 계실는지요. 또 한열이는, 이 석규 씨는…그러나 종철 법우님, 이번 선거가 우리에게 좌절과 분열만을 준 것은 아닙니다. 이번 선거야말로 우리의 역량과 내부의 갈등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또 바로 몸과 몸을 더욱 단단하게 흔들리지 않게 엮어 놓을 수 있게 하는 계기일 테니까요.
종철 법우님.
이 글이 비록 불교 지면을 통하여 그대에게 보내지지만, 불교에 관한 언급을 삼가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불교 집단이 벌이는 반역사적 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진대, 달리 첨언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마도 이 글이 불자에게 읽히게 되면 이 잡지의 편집장은 또 한번 곤욕을 치르게 될 것 같습니다. 현 정권의 그늘에서 배부르게 살아온 또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뇌없이 단순한 안정만을 희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럴 터이며, 그들에게는 역사의 책임이나 정당성의 확인 작업은 다만 낭비나 혼란을 가중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어차피 이 집단은 그대의 죽음에도 방관했고 그래서 결국 그대의 가족은 불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에 가서 그대의 죽음을 고해야 했으니까요.
일전에 그대의 부친을 만났을 때의 곤혹스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읍니까.
종철 법우님!
거리는 다시 사과탄이 터지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선거 부정 시비로 온 골목이 시끌시끌합니다. 빵 상자로 투표함이 위장되었고 이곳 저곳에서 투표수보다 개표 수가 더 많았다고 떠듭니다.
종철 법우님, 다시 맞는 새해 새아침. 우리에게 그대의 불꽃을 점지하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