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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中心으로의 중도中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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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향기 - 경성 2010년 08월 342호
세간은 물론 출세간의 환경에서도 어떤 경우나 어떤 환경에서라도 획일적인 주장과 이념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견제는 균형과 조화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물리적이고 비판적인 시각과 견해로 상호간의 상처와 폐해로 치닫고 만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처할 때마다 나와 우리와 상반되는 견해와 이익을 추구하는 상대방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사고思考의 유연성柔軟性이 절실해진다. 절대적인 진리를 제외하고, 어떤 주장이나 견해일지라도 모든 시각과 입장에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나의 입장과 우리의 처지에서만 맞을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나와 다른 주장과 견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다양함과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나의 주장과 상대의 의견이 서로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한결같이 모두의 개혁과 향상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 중점中點의 가치관이다. 보수保守와 진보進步의 양방兩方에서는 사회의 안녕과 국가의 발전이라는 중심中心의 가치가 동일하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노사관계도 회사라는 중심점에서 비롯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대립과 반복과 분규에 대처하고 해결하는 방책으로 중심中心과 정중正中의 진리인 중도中道에 주목해야하는 요점要點이 있다.
중도에서의 공관空觀은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중도이고, 그것이 불교의 근본적 입장에 직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도의 원형原型은 원시불교에 설해진 부처님의 최초 설법으로서의 고락중도(苦樂中道 ;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양극단을 떠난 8중도, 팔정도八正道)이며, 이것은 점차적으로 생사중도生死中道·일이중도一異中道·유무중도有無中道·단상중도斷常中道 등의 상세하고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리된다.
확실한 것은 중도의 공空은 유有에 대립되는 무無나 지식에 대립되는 무지無知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언어와 사유를 초월하는 것을 강조하여 공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정중正中의 중中이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허공이지만 실제로는 공기가 가득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보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공이며, 무와는 다른 개념이다.
중도에 관한 상세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생사生死와 단상斷常과 일이一異와 거래去來 등의 여덟 가지를 부정하는 팔불八不은 모든 이원적二元的인 상태에 대해서 관념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비판하며 배척하는 부질없는 논쟁(희론 戱論)을 없애는 것이며, 동시에 상대적이고 편집偏執된 모든 견해를 여덟 가지 상황으로 총괄하여 부정하면서 상대의 시각과 입장에 유연柔軟한 대처對處를 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생生과 멸滅이라는 상대적 상황에 대해서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는 뜻으로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선언하는 동시에, 생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멸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유연한 사고로 생과 멸의 양쪽을 모두 포용하고 섭수하는 것이 생멸중도의 본의本義인 것이다. 생이나 멸의 양극단兩極端으로 치우치는 오류나 편견을 부정하여 없애기보다는 양극단을 포용하고 용납하는 동시에 종합하고 초월하는 새로운 이념, 즉 옳고 바른 정중한 가치관을‘중도’라는 이름으로 실현하고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에 입각한 부정이나 비판은 단순한 부정이나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경계의 양극단을 섭수하고 용납하는 중심의 경계로서 중도를 제시하고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바라문에 대항한 수많은 사상가와 사문 수행자 가운데 불교가 지역적이고 시대적인 한계를 초월하고 뛰어 넘어서 아시아 전역을 거쳐 서구의 지역까지 전세계적全世界的으로 이천칠백여년의 장구長久한 세월동안 이어지고 성행할 수 있는 저력은 수많은 학설과 지역의 풍속을 수용하고 섭수하는 다양성도 중대한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또한 모든 분파와 종파의 학설과 이념, 국가별國家別 지역별地域別로 다양한 형태의 제반 수행에서 그 중심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깨달음이라는 구심점求心點을 취향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수많은 사상과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불교학의 전문화는 용이치 않았을 것이며, 각 지역의 시속時俗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시대와 국경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불교와 깨달음이라는 중심점이 없었다면 불교라는 명칭은 사문화死文化된 용어로 전락해 버렸을지 알 수 없다.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莫論하고 일체의 반목反目과 분규에 대처하는 대안으로 중도의 구현, 다시 말하면 다양성의 인정과 함께 화합과 발전이라는 중심을 확립하는 데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불자에게 맡겨진 시대의 소임所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