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에 어부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좀더 해봐야겠다. 실은 우리 아버지께서 즐겨보시는 TV프로그램이 바로 낚시 채널이다. 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낚시는 손맛이라고 하는데, TV를 보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니 이는 필시 어선(漁仙, 술을 마시지 않고도 즐겁다는 주선酒仙에 필적할만한)의 경지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낚시꾼들을 스스로 강태공이라고 부르게끔 한 인물이 있으니 전국시대 굴원이 만났다는 그 어부보다 역사가 깊은 바로 태공 강상(姜尙, 周代활동)이다. 그는 무왕의 눈에 들고져 곧은 낚시바늘을 꿰고 위수渭水가에 앉아 시간을 낚고 자신의 주군主君 낚았다. 그러니 애초부터 낚시에 마음이 없었던 그를 두고 어부라고는 할 수 없고, 굴원의 <어부사>에 등장하는 어부야말로 원조의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이번엔 그 내용의 일부를 감상해 보자.
굴원이 내쫓기어 강가와 물가에 노닐고 호반을 거닐며 읊조리고 있을 때, 어부가 허술한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당신은 초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 초나라 왕실의 높은 벼슬)가 아니시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소?”
굴원이 대답하였다. “세상은 온통 다 흐렸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어 추방을 당하게 되었소.”
어부는 말하였다. “무릇 성인은 사물에 막히거나 걸리지 않고 세상과 함께 잘도 변화합니다. 세상 사람이 다 흐리거늘 어찌하여 흙탕물이 튀지 않을 수 있으며,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어찌하여 그 찌꺼기를 씹고 밑술을 들이마시지 않을 재간이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고상한 척 행동하여 스스로 추방을 자초하시었소?”
이에 굴원이 대답하였다.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고 하였소. 어떻게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이 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희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 쓸 수는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부는 굴원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고 떠나면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창랑(한수漢水의 하류)의 물이 맑거든 그 물로 나의 갓끈을 씻는 것이 좋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거기에 나의 발을 씻는 것이 좋으리라.”
이렇게 노래한 어부는 떠나고 다시 말이 없었다는 이야기 이다. 굴원이 만난 어부는 마치 물과 같은 인물이었다. 자신의 몸을 두는데 있어 세상의 청탁을 탓하지 않고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 마음을 갖추면 된다는 것이다. 말이야 그럴듯하긴 한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게 쉬웠다면 산중과 세속의 구분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강태공과 어부 모두 모질고 탁한 세상을 두고 시간을 낚고자 한 것은 같지만 한 사람은 낚시보다는 세상을 낚는 일에,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낚는 일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이니 그들의 경지가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과거 묵객들에게 어부는 단순히 물고기 말고도 여러 가지(!)를 낚아야 하는 아주 복잡한 인물형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옛 그림 속 등장인물 중에 신선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 화가 이숭효(李崇孝, ?~?)가 그린 작은 사이즈의 <어부도> 속 인물은 통천관洞天冠을 쓰고 맨다리를 드러내고 어께에 낚싯대를 둘러맨 그 모습에서 이후 등장하는 이명욱 작품 속 어부의 모델이 되었다. 날씨도 뜨거워지는 요즘, 무엇을 낚으며 소일을 해볼까 궁리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