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승이 절에 도착하자, 조주 선사가 물었다.
“여기에 처음 왔는가, 아니면 온 적이 있는가?”
“온 적이 있습니다.”
“차나 마시게.”
조주 스님이 또 다른 선승에게 같은 질문을 하니, 그가 “온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자, 조주 선사는 또 “차나 들게” 라고 하였다.
뒤에 원주(院主) 스님이 의심이 나서 조주 스님께 물었다.
“왜 온 적이 있다 해도 차를 마시라 하고, 온 적이 없다 해도 차를 마시라고 했습니까?”
“자네도 차나 한잔 마시게.”
이처럼 조주 선사는 세 스님에게 똑같이 “차나 들게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선사가 상대적인 분별의식을 끊은 깨달음의 절대경지에서, 선승의 이리 저리 찾고 구하는 치구심馳驅心을 내려놓도록 이끄는 방편이다. 생각과 분별을 허용하지 않고, 일체의 의혹과 근심, 망상을 털어내고, 진실하고 순박하게 당하當下(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이 선禪임을 웅변하고 있다. 송나라 무문혜개 선사는 《무문관》에서 ‘평상시도平常是道’를 설명하면서 “부질없는 일들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나 모두 족히 수도할 수 있다”고 했다. ‘끽다거’ 화두는 마음을 휘감고 있는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벗어 던지고 청정한 마음으로 차 마시는 일과 같은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될 때 자신과 선은 하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평상심으로 차를 마시는 것은 죽을 먹고 발우를 헹구는 것처럼 선禪을 닦는 최상의 수행법과 다름 아니다. 다엽과 다구의 좋고 나쁨에 구애받지 않고, 차를 우리는 솜씨의 우열에 개의치 않고, 차를 마시는 방식과 다례에 집착하지 않고, 심지어 차를 마신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을 수 있는 심경이 되어야만 비로소 ‘선다일미’를 입에 올릴 수 있다. 이것이 일상화 되어 무르익고 무르익었을 때 깨달음의 경지인 일체의 모순을 없앤 ‘한맛(일미一味)’이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차 생활은 어떠해야 할까. 시대가 달라져 다예茶藝는 발전했을지언정, 다도茶道의 근본정신이 변함이 없다. 차인이라면 마땅히 한 잔의 차를 통해 우주의 한없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청정하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세상을 맑고 따뜻하게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선법에서 깨닫는 기쁨[法喜禪悅]을 양식으로 삼고 자비의 행行과 원願을 실천하며, 선차의 맛과 향기를 온누리에 전하는 평화의 메신저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예사로운 일을 ‘다반사茶飯事’라 하듯이 생활과 선수행은 둘이 될 수 없기에 걸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행위가 잠시도 도道를 떠날 수 없다. 정신예술의 정점인 다도가 선수행이 될 수 있는 것은 차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인간관계의 이치를 깨닫고, 과거나 미래의 허상에 매이는 삶에서 ‘지금 여기’의 삶으로 깨어나기 때문이다. 차의 빛깔ㆍ향기ㆍ맛을 느끼고 사람과 차, 사람과 사람간의 인연의 흐름을 ‘분별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여실지견如實知見)’ 모든 현상의 실상實相을 보게 된다. 선禪의 정신으로 고요히 한 잔의 차를 음미할 수 있다면, 무의식적인 말과 행동이 줄어들고 항상 또렷또렷하고 고요고요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한결같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하는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며, 여유로운 시간에 한 잔의 차로 우주와 하나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