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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이 도道임을 일깨우는 선차禪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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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본 문화 - 김성우 2010년 06월 340호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 같다. 스님들은 보리심을 발하는 새벽예불로 수행의 일과를 시작하지만, 세간에 있는 필자는 차茶 마시는 것을 일종의 의식처럼 치룬 후 업무에 들어간다.
집에서 일할 때는 직접 찻물을 데우지만, 사무실에서는 정수기의 따뜻한 물을 준비한다. 너무 뜨겁지 않게 찻물이 식은 후 다관에 녹차를 넣을 때면 작은 기다림과 흥분이 있다. 이번에는 어떤 빛깔과 향기, 맛이 나의 눈과 코, 혀와 상봉할까? 은은하고 구수한 녹차 향기가 코에 들어오면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안함을 준다. 부드러운 찻물이 입안을 맴돌다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면 몸과 마음의 때가 함께 씻겨져 내려가는 것만 같다. 마음은 평화로워지고 멍청하던 의식은 각성覺醒이 되어 고요하고 또렷해진다. 그야말로 장거리 운전을 하기 위해 차를 점검하고 시동을 거는 순간이다.
추사 김정희는 《다선송茶禪頌》에서 “고요히 앉은 곳 반쯤 마셔 차향 처음 같고(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하게 쓰일 때 찻물 흘러 꽃향기가 피네(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라고 녹차의 색과 향과 맛의 조화를 통한 삼매경을 묘사한 적이 있다. 아침에 음미한 몇 잔의 차는 하루종일 일삼매인 선禪에 녹아들어 차와 선이 한 맛인 ‘선다일미禪茶一味’의 심경을 연출케 한다. 이렇듯 녹차를 마신 후 일을 시작하면 잡념이 적고 빠르게, 그리고 깊이 일에 몰입할 수 있어서 차 마시는 시간은 이제 필자에게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일과가 되었다.
선禪과 다도는 일체의 경계에서 벗어나 일없이 편안하고 무심한 가운데 무궁무진한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하며 자유로운 깨달음의 생활을 누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바로 일체 개별적, 타율적인 세속적 견해를 벗어나 무일물無一物(한 물건도 없는 진공묘유의 경지)의 경계에 직접 들어간 상태이다.
이러한 ‘선다일미’의 정신은 당나라 때 마조 선사가 제창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상심시도’는 일상생활의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있어서 마음의 평정平靜과 평등平等을 유지하며 억지로 인위적인 수행을 하지 않는 선법을 가리킨다. 훗날 조주 선사는 이러한 ‘평상심시도’를 이어받아 무심으로 ‘죽을 먹고 발우를 헹구는’ 평상적인 일이 가장 철저하게 선을 닦는 일임을 강조했다. 때로는 ‘죽을 먹고 발우를 헹구는 것’을 ‘차나 한 잔 드시오[喫茶去]’ 라는 화두로 바꿔 말하곤 했지만, 이 역시 평상심이 바로 도임을 천명한 공안들에 다름 아니다.
선차禪茶의 상징이 된 조주 선사의 ‘끽다거’공안은 《조주록》에 등장한다.

한 선승이 절에 도착하자, 조주 선사가 물었다.
“여기에 처음 왔는가, 아니면 온 적이 있는가?”
“온 적이 있습니다.”
“차나 마시게.”
조주 스님이 또 다른 선승에게 같은 질문을 하니, 그가 “온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자, 조주 선사는 또 “차나 들게” 라고 하였다.
뒤에 원주(院主) 스님이 의심이 나서 조주 스님께 물었다.
“왜 온 적이 있다 해도 차를 마시라 하고, 온 적이 없다 해도 차를 마시라고 했습니까?”
“자네도 차나 한잔 마시게.”

이처럼 조주 선사는 세 스님에게 똑같이 “차나 들게나”라고 말했다. 이것은 선사가 상대적인 분별의식을 끊은 깨달음의 절대경지에서, 선승의 이리 저리 찾고 구하는 치구심馳驅心을 내려놓도록 이끄는 방편이다. 생각과 분별을 허용하지 않고, 일체의 의혹과 근심, 망상을 털어내고, 진실하고 순박하게 당하當下(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이 선禪임을 웅변하고 있다. 송나라 무문혜개 선사는 《무문관》에서 ‘평상시도平常是道’를 설명하면서 “부질없는 일들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나 모두 족히 수도할 수 있다”고 했다. ‘끽다거’ 화두는 마음을 휘감고 있는 세상의 모든 번뇌를 벗어 던지고 청정한 마음으로 차 마시는 일과 같은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될 때 자신과 선은 하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평상심으로 차를 마시는 것은 죽을 먹고 발우를 헹구는 것처럼 선禪을 닦는 최상의 수행법과 다름 아니다. 다엽과 다구의 좋고 나쁨에 구애받지 않고, 차를 우리는 솜씨의 우열에 개의치 않고, 차를 마시는 방식과 다례에 집착하지 않고, 심지어 차를 마신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을 수 있는 심경이 되어야만 비로소 ‘선다일미’를 입에 올릴 수 있다. 이것이 일상화 되어 무르익고 무르익었을 때 깨달음의 경지인 일체의 모순을 없앤 ‘한맛(일미一味)’이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차 생활은 어떠해야 할까. 시대가 달라져 다예茶藝는 발전했을지언정, 다도茶道의 근본정신이 변함이 없다. 차인이라면 마땅히 한 잔의 차를 통해 우주의 한없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청정하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세상을 맑고 따뜻하게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선법에서 깨닫는 기쁨[法喜禪悅]을 양식으로 삼고 자비의 행行과 원願을 실천하며, 선차의 맛과 향기를 온누리에 전하는 평화의 메신저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예사로운 일을 ‘다반사茶飯事’라 하듯이 생활과 선수행은 둘이 될 수 없기에 걸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행위가 잠시도 도道를 떠날 수 없다. 정신예술의 정점인 다도가 선수행이 될 수 있는 것은 차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인간관계의 이치를 깨닫고, 과거나 미래의 허상에 매이는 삶에서 ‘지금 여기’의 삶으로 깨어나기 때문이다. 차의 빛깔ㆍ향기ㆍ맛을 느끼고 사람과 차, 사람과 사람간의 인연의 흐름을 ‘분별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여실지견如實知見)’ 모든 현상의 실상實相을 보게 된다. 선禪의 정신으로 고요히 한 잔의 차를 음미할 수 있다면, 무의식적인 말과 행동이 줄어들고 항상 또렷또렷하고 고요고요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한결같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하는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며, 여유로운 시간에 한 잔의 차로 우주와 하나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