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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천불선원장 황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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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0년 06월 340호
직지사 선원장 황노스님은 해제철이라 정선에 머물고 계시다 했다. 며칠 후엔 하동으로 갈 테니 하동으로 오라 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엔 다시 서울에서 만나자 하셨다. 참선만 한 수좌라고 하여 걸음이 많지 않으실 거란 생각과는 달리 동분서주하시다.
오후엔 제법 여름의 부산함을 공기 중으로 쑥쑥 밀어 올리는 늦봄의 휴일 오후, 서울 우이동 보광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앉자마자 스님은 말차를 내어주신다.
“일년 내 먹을 차를 사러 하동에 가려던 참이오.”
하동에 가려던 뜻은 알겠고, 정선은 어인 일이고 서울엔 어인 일인지 궁금증이 더 커진다.
“정선에 참선하는 토굴이 있고, 여기 보광사 선방도 관여를 하지요.”
수좌에게 결제철과 해제철이 뭐 다를 것이며 선방이든 길 위든 뭐 다를 것인가 하는데, 말씀을 가만가만 짚어보니 스님의 걸음이 머문 곳들은 모두 선방이다.
“결제하면 직지사 젊은 스님들과 함께 정진하고 해제하면 정선에 가서 정진을 해요. 늘 정진의 연속이지.”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입안에 차를 머금는다. 차는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더니, 맑은 스님 앞이라서인지 차 맛이 참 달고 건강하게 느껴진다.
“내가 선방에서 벽만 보고 있어서 낙이 없어요. 그래서 차를 좋아해요. 차에 대한 특별한 지식은 없어도 마셔보면 그 풍미를 알지.”
1980년에 출가했으니 법랍도 서른 해를 훌쩍 넘겼다. 그런데 그 서른 해 동안 스님은 오로지 선방에만 머물렀단다. 보광사 조실 정일 스님을 은사로 두신 스님은 어느 날 걸망 지고 야반도주해 문경 봉암사 선방에 들어갔다. 그것이 선방과의 첫 인연이다.
“수행이 된 스님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지요. 근본적으로 마음 편하려고 출가한 거 아닌가. 그러니 마음 편하려면 마음을 닦아야지요. 몸은 고되어도 마음 편한 게 극락이라.”
생로병사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으니 그것이 우선이며 전부가 아니냐는 말씀이다.
“화두를 들고 있으면 일체 생각이 붙지를 않아요. 관념과 생각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은 중생이 사는 삼계, 안심할 수 없는 세계지요. 그러나 화두 정, 그 정을 익히면 생사가 붙지 않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것이 득력이지.”
‘이 뭐꼬’ 화두를 들고 계신 스님의 말씀은 거침이 없다. 그런데 그게 참 편안하다. 스님의 삶이 참으로 단출하고 깨끗해 보이는 것은 스님에게서 느껴지는 가벼움 때문일까.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몸과 마음을 비춰보니 텅 비었다는 말이 찻잔에 비치는 듯하다. 다리에 쇳덩이 하나씩을 매달고 허우적대며 고해의 바다에 사는 중생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니 낯설로 설렌다.
스님은 전생에도 중이었던 게 아닌가 하신다. 처세할 줄도 모르고 명예나 돈을 쫓지도 않는 성품에 대한 말씀이다. 어려서부터 밤새도록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참구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어느 날 꿈을 꿨어요. 큰 강을 건너는 쪽배를 탔는데 스님이 노를 저어가고 있고 내가 그 배에 타고 있더군요.”
참구하느라 기독교든 천주교든 모든 종교를 섭렵할 정도였으나 그 어떤 것도 양에 차지 않았다. 그때, 스님이신 속가의 친 누님이 주신 반야경 해설본을 보고 출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부처님이 명예나 돈이 없어 출가했나? 출가한 근본 취지를 잊지 말아야 하고, 출가사문은 스승을 잘 만나야 해요. 스승이 선지식이거든. 그러니 난 복이 많지요.”
업의 세계를 건너가는 배, 부처님의 정법을 만난 것만도 다행이다. 그러나 배의 선장이 마음의 눈을 뜨고 있어야 중생들을 배에 태우고 길을 잘 찾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마음의 눈을 뜬 선장이 수행력이 있는 선지식이란 말씀이다.
선방에서만 30년, 선원장으로만 4년의 세월을 보내고 계시니 중생 제도는 언제 하시려나 여쭈니 단박에 말씀하신다.
“지금은 우리 스님들이 더 급해요.”
스님들이 먼저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야 중생들한테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라 할 수 있단 말씀, 스님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한다는 말씀이다. 수행을 철저히 하고 중생을 제도해야 제대로 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말씀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정진을 많이 하고 선방이 안정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를 제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러 외도 선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스님은 무엇보다도 화두 선만을 말씀하신다.
“화두 선이 어렵다고 다른 선을 말들 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화두 선입니다. 그걸 못 하니까 자꾸 다른 선을 말하는 거지. 화두 선은 순수하면 되는 거예요.”
호흡이나 명상이나 기도니 염불이니 그런 것들은 생각을 끊는 게 아니라 잠시 쉬게 할 뿐이란 말씀이다. 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윤회법이며 화두 선만이 생각을 붙지 않게 통일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아무 걱정도 없으십니까 여쭈니 단박에 답하신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요. 세상에서 최고 편하게 살지요.”
아무리 스님이라도 수행이 안 되면 좌불안석인 법. 스님은 수행을 하면 할수록,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편해지는 것이란다.
“그런데 수행자가 많지 않아요. 선방에도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스님들이 중생들처럼 늙어가니까, 오갈 데 없는 찬밥 신세가 되면 어쩌나 집이라도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병들면 어쩌나 걱정하는 거지. 중생들 하는 망상을 왜 승가에서 하나요? 조계종에 수행하는 스님 굶기는 법 없고, 수행만 잘 하면 오히려 여기저기서 모실 거예요.”
생사를 해결하려는 자가 생사에 끄달려 있는 모습이란 말씀이다. 공부가 안 되니 내면이 아닌 겉치레에만 집중한다는 말씀이다. 오늘 공부 못 하고 가는 게 한이라는 생각으로 진실되게 공부하면 그런 생각은 필요 없는 것. 스님은 처음 선방에 들며, 화두 하나 타파하고 죽는 것 즉 견성하고 죽는 게 원이라 생각하셨단다.
“좌복 하나 있고 세끼 밥만 있으면 극락입니다. 화두만 들면 천하가 다 나입니다. 나 아닌 것이 없으니 세계가 다 마음 안에 있어요.”
공부는 스승을 의지해서 대중처소에서 해야 한단다. 대중을 떠나서는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단다. 산의 나무들을 보면 옆에 있는 나무들 때문에 제멋대로 자라지 않고 곧게 자라고 그 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룬다. 그러나 민둥산에서 혼자 자라는 나무는 제 멋대로 자란다. 그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제 멋대로 공부하게 되면 저 혼자밖에 모르고 착각에 빠져 다른 길로 갈 수 있지만 함께 탁마하다보면 똑바른 길로 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황노스님은 선원장으로 있으며 스님들이 선원에 처음 들어오면 화두와 공부를 먼저 물어본다. 함께 탁마해야하기 때문이다.
“대중처소에서 수행을 많이 한 스님, 선방 수좌들이 인정해주는 스님이 그래도 중생들에게 길을 제대로 일러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오대산 한암스님이 그러셨어요. 나는 천고의 말 못 하는 학이 될지언정 말 잘 하는 앵무새는 되기 싫다고.”

부처님의 경을 그대로 일러주는 것은 앵무새고 녹음기일 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수행을 하고 깨달아서 자신의 말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럴 때에야 진정으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스님들이 그 말씀을 듣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단 얘기다. 스님이 물으신다.
“좋은 말은 어디에든 있어요. 그런데 왜 세상이 혼탁한가?”
결국 실천의 문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좋은 부처님의 말씀도 세상에 다 퍼져 있지만 수행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하는 길만이 앞으로 불교가 유지되는 길이고 실천하는 길만이 불교가 사는 길이라 생각하신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이 화두법을 만나 열심히 정진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불자들도 정법에 연이 되어 선에 대해 공부하고 수행했으면 좋겠고 선 사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좋겠단다. 그것이 스님의 원력이다.
스님은 요즘 불자들이 공부는 없이 바깥으로만 치우쳐 바쁘기만 하다며 선에 대해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머리가 복잡한 중생을 쉬게 해주기 보다 더 복잡하게 만드는 사찰의 문제도 말씀하신다. 감로수와 같은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사찰이 부족한 것 또한 수행의 부재라 하신다.
“껍데기만 알면 몇 천 겁이 지나가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조금이라도 실천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수행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극락입니다. 시비가 끊어진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선 지금 실천해야 해요.”
막막하기만 한 중생은 그 실천의 첫 걸음이 무엇인지 여쭙는다.
“내 마음자리가 부처자리라는 확실한 믿음, 그 마음자리를 찾아야겠다는 간절함만 있으면 돼요. 그러면 저절로 드러나요. 아주 쉬워요.”
스님은 ‘차 맛 참 달다!’ 하시며 세상의 모든 사치를 다 누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신다. 천하가 다 내 것이라 여기는 표정이 저러할까….
스님을 따라 절 마당을 거니는 햇살 좋은 오후, 스님의 걸음이 거침없이 날래다. 그런데도 편안하고 맑다. 그것은 상像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앞서 걸어가는 스님이 ‘이 뭐꼬’ 화두를 들고 계시지 않는가.
스님이 떠난 자리에 앉아 나는 오래도록 그날의 햇살을 즐겼다. 세상의 모든 사치를 다 누리는 듯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