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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값을 내시겠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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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0년 12월 106호
선재동생은 평소보다 빨리 이부자리 속에서 빠져나왔다. 냉수를 한 컵 맛있게 들이키고 난 후에 어제 오후의 일을 떠올렸다.
초겨울 날, 그것도 짬뽕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의 오후는 나른함과 더불어 짜증스러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서류를 건성으로 훑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스리가 전화를 건네주었다.
\"전화왔어요.\"
\"예, 전화바꿨습니다.\"
\"저어, 친구분인 정훈씨 아시죠?\"
\"그런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선재동생은 친구를 통해서 무슨 부탁을 하려나 보다하고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그분 소개로 전화드렸어요. 뵙고 싶어서요.\"
선재동생은 뒤로 젖혔던 허리를 곧추세우면서 말했다.
\"절 만나고 싶다구요?\"
선재동생은 눈올 크게 폈다. 나른함과 자증스러움이 저만큼 도망치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데이트 신청인 것이다.
\"그렇다면 말이죠. 저어…\"
선재동생은 약간 더듬거리면서 약속 장소와 시간을 가르쳐주었다.
정훈이라면 아주 성실한 친구로서 보증수표와 다름없었다. 그런 친구의 소개라고 하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선재동생은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어젯밤 사이 마음이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정훈이의 간청에 못이겨 마지못해 전화를 한 것은 아닐까. 오늘 오후 나를 만나자마자 실망을 하고 돌아서는 것은 아닐까. 하긴 선재동생 역시 졸업 전후로 해서 여러 차례 미팅을 해보았지만 번번이 딱지를 맞았던 것이다. 말처럼 길쭉한 얼굴에 땀구멍이 유달리 커서 유자껍질 같은 피부, 그런데다 빙빙 돌아가는 돗수높은 안경을 끼고 있는 선재동생에게 호감을 가진 아가씨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선재동생은 예의 그 돗수높은 안경을 끼고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녀석, 참 고맙기는…\"
화려한 무늬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선재동생은 훈이의 호의를 고맙게 생각했다. 더욱이 녀석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약속했던 괜찮은 아가씨 한 명 소개해주겠다던 말이 새삼 떠올랐던 것이다.
선재동생은 사무실에 와서도 그 여자 생각만 하였다. 일이 손에 안잡혔다. 어떤 아가씨일까?
훈의 애인인 순애씨 친구일까?
\"이봐요, 어제 결재서류 어떻게 됐어?\"
한과장이 생각에 잠겨 있는 선재동생올 채근했다.
\"아, 예. 다 돼갑니다.\"
\"어서 올려요.\"
\"예, 예……\"
보고서 몇 건으로 오전 일과가 후딱 지나가 버리고 오후가 되었다.
-저, 빨간 투피스를 입고 있을 거예요.
오후 시간이 약간 지나서 미스 리가 선재동생 옆으로 다가왔다. 미스 리는 종이잔 커피를 두 잔이나 들고 있었다. 점심을 했으니 이제 졸음을 쫓으라는 미스 리의 사심없는 배려였다.
\"어제 그 아가씨 누구예요? 목소리가 참 좋던데.\"
선재동생의 옆자리가 되어서인지 직원들간에 가장 많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물론 서로가 호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이라기 보다는 친구같은 사이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결혼과 사랑과 직장문제 등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많은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미스 리도 선재동생만큼이나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어 어찌 보면 두 사람은 형제간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오종종한 얼굴에 작달막한 키 -. 치마보다는 티샤쓰에 청바지 차림을 더 좋아하는 여자-. 이러한 미스 리와 선재동생은 삼 년째 서로 가장 가까운 옆자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늘 티격태격 했지만 토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스 리가 커피 식는다고 채근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 아가씨 누구냐니까요?\"
\"그냥 조금 아는 사람이지 뭐.\"
그제야 미스 리가 선재동생의 넥타이에 눈길을 주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래서 넥타이가 달라졌군요. 어쩐지……\"
\"아무거나 손에 잡힌 대로 매고 나온걸 가지고 뭘 그래.\"
\"숨겨둔 여자가 있다니……엉큼하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던가?\"
다른 때 같으면 한마디 해주었을텐데 선재동생은 그냥 대신 속으로 한마디 참기로 했다. 내뱉었다.
-\"아이구 애물단지. 빨리 시집이나 가지 않고……\"
오후 시간도 역시 어젯밤처럼 지루하게도 안갔다. 들떠 있던 오전과는 달랐다. 터무니없이 미스 리가 마음에 걸려 공연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미스 리와는 장래 약속은 커녕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마음에 걸릴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 빨간 투피스의 아가씨를 들먹일 필요도 없었는데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의리 때문에 말해주었을 뿐이었다.
자료스크랩을 한 권 정리하고, 결재서류를 작성하고 나자 겨우 여섯 시가 되었다. 선재동생은 현관문을 나서면서 심호흡을 했다. 초겨울의 하늘은 벌써 어둠의 장막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약속장소인 커피숍에 들어서자, 두리번거리던 선재동생에게 구석자리의 아가씨가 번쩍 손을 들었다. 빨간 투피스를 입고 있는 그 아가씨였다.
\"안녕하십니까?\"
\"안경 끼신 걸 보고 알아봐었죠. 정훈씨에게 말씀 많이 들었거든요\"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하얀 치아가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빨간 빛깔의 원색이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더욱 깜찍하게 연출해 내고 있었다.
\"저는 미스 신이라고 해요.\"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았다.
\'제가 살께요.\"
\"아닙니다.\"
그 사이 번개처럼 주문한 음료수가 나오고 미스 신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괜찮으시겠죠?\"
\"예, 그럼요.\"
\"정훈씨는 제가 근무하는 K회화학원 학생이었어요. 영문과를 나오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이렇게 뵙자고 한 건 이번에 저희 회화학원에서 영어공부하시는 분들을 위해 아주 좋은 상품을 내놓았거든요. 그래서 꼭 권해드리고 싶어서……\"
선재동생은 쥬스를 빨대로 마시다 말고는 탁자 위에 놓았다. 달콤했던 쥬스가 쓴 맛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미스 신은 아직도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기회가 오면 해외 근무도 나가셔야죠. 그러려면 회화는 필수적으로 마스터해 놓아야 되지않겠어요?\"
\"예……\"
대답을 하지 않기도 좀스러운 것 같아 건성으로 대꾸를 하면서 선재동생은 심한 요의를 느꼈다. 한 모금 마셨던 쥬스가 벌써 오줌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오줌이 마려웠다. 그런데도 사나이의 입장에서 한 잔을 다 마시고 일어나야 체면이 설 것 같았다.
\"아침 저녁으로 30분씩만 시간을 내보세요. 그러면 기본실력이 있으시니까 세 달도 못되서 다 마스터 하실 수 있을테니까요.\"
이유고 미스 신이 결론을 내렸다. 책가방 속에서 10개짜리 테이프 박스를 꺼냈다.
ꡒ이게 바로 저희 학원에서 개발한 테이프에요. TV에 대대적으로 광고가 나갈거예요.\"
선재동생은 쥬스를 마저 다 마시지도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잠깐 화장실 좀……\"
선재동생은 찔금찔금 소변을 보고 난 다음, 화장실 입구에 있는 공중전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공중전화카드를 찾기 위해 지갑을 꺼냈다. 지갑은 여느 때와 달리 두툼했다. 데이트 자금으로 쓰려고 은행에 예금한 돈을 찾아왔던 것이다. 수첩 속에 직원명단을 쳐다보면서 바로 미스 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미스 리에게 약속장소와 시간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제야 선재동생은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미스 신의 마술로부터도 풀려났다. 이번에는
선재동생이 더 큰 소리로 미스 신에게 한마디 했다.
ꡒ죄송하지만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차값을 내시겠다구요? 그럼, 그렇게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