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산 해인사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장경판전. 700여 년 전 고려인의 나라 사랑 정신과 깊은 불심을 간직한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고 있는 그 곳, 그 장경판전을 천안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4일 새단장한 독립기념관의 제1관 \'겨레의뿌리\' 전시관이 바로 그 곳입니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에서 팔만대장경이라니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독립기념관은 그 이름처럼 암울했던 역사와 독립에 관한 내용만 전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응하여 올바른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온 국민의 성금으로 1987년 8월 15일 광복절에 개관하였습니다. 이곳에는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보여주기 위한 7개의 상설 전시관이 있는데, 제2관부터 6관까지는 개항기 겨레의 시련에서부터 다양한 독립운동, 그리고 광복까지를 다루고 있고, 제7관은 독립운동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전시관입니다. 그 중 제1관에서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불굴의 대외항쟁사를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힘든 시기를 거쳤지만, 그 전에 유구한 역사를 갖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민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보여줄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의 전시관에 그 모든 것들을 보여줄 수는 없기에 각 시대별로 대표적인 유물과 문화를 꼽아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만주를 호령한 역사를 보여주는 광개토대왕릉비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중흥을 꿈꾸었던 무령왕의 화려한 무덤과 유물들, 그리고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한 발해는 온돌을 중심 주제로 잡았습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여 화려한 귀족문화와 함께 호국불교를 꽃피웠습니다. 그래서 상감청자, 금속활자와 함께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을 선정하여 전시하게 된 것입니다. 해인지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1251년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부처의 힘을 빌려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로 간행되었습니다. 8만 장이 넘는 방대한 양과 함께 완벽한 제작 솜씨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장경으로 꼽히고 있으며,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은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 건물로,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자연환경을 최대로 이용한 보존과학의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팔만대장경 경판은 기존에 해인사의 협조를 받아 복제한 자료가 있었지만 장경판전을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2007년 설계 당시에는 관련 문헌과 사진을 바탕으로 모형을 구상하였지만 실제 크기와 비율이 달라 그대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인사에 전시 내용을 설명하고 특별히 협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해인사에 실측을 하러 간 때는 2009년 12월, 쌀쌀한 바람이 살을 에는 겨울이었습니다. 날이 춥기도 했지만 장경판전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친절하게 맞아주신 스님 덕분에 궁금한 것들도 많이 물어보고 장경판전 내부에 직접 들어가서 촬영과 실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가야산에서 불어오던 매서운 칼바람이 장경판전 안에서는 잔잔해진 것 같고, 건조하던 겨울 공기도 선선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직접 살펴보고 장경판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다니, 내가 독립기념관에서 전시를 하는 것에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실측한 자료와 조언을 바탕으로 독립기념관의 전시관 내부에는 장경판전 모형이 실물크기로 재현되었습니다. 당초 축소모형을 계획했지만 현장감을 높이기 위해 크기를 키우고, 장경판을 꺼내보거나 인쇄하는 스님 모형을 곳곳에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장경판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관람객들에게도 전달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해인사 장경판전 문살 틈으로 빼꼼히 건너다보는 게 답답했던 분들은 독립기념관에서 좀 더 가까이 현실감 있는 팔만대장경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독립기념관의 제1관 \'겨레의뿌리\'를 포함한 6개의 상설 전시관은 모두 입체적이고 체험중심의 전시관으로 새롭게 교체되었습니다. 게다가 2008년부터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으니 부담 없이 즐거운 역사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해인사 장경판도 보고, 나라사랑 정신을 키울 수 있는 독립기념관 나들이를 떠나는 것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