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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넓은 품이 나를 새롭게 바뀌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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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명신/해인사 승가대학 1학년 2010년 05월 339호

해인사에서 맞이하는 첫 봄이 어느새 무르익어 가고 있다.
눈이 시리게 푸른 햇살과 다정한 봄비가 번갈아 오가며 여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낯설기만 하던 주변 풍경도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도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비 온 뒤 맑은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며 수업을 듣기 위해 올라가던 중 일 년 전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기형도의 싯구처럼, 하나의 상실이 어느 날 나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벼운 열병처럼 지나 보내고 털어내는 일이 내게는 조금 힘겨웠던가 보다. 하나의 무너짐이 연쇄작용을 일으켰고 세상은 현실감 없이 부유하기 시작했으며 주위 모든 것이 회색으로 흐릿해졌다. 모든 게 짧은 농담 같았다. 나는 중심을 잡기 위해 발버둥 쳤고 방황 끝에 만나게 된 것이 부처님이었다.
-그 당시에 대해 누군가 나의 연약함을 질타하는 말을 했었고 나는 이렇게 영화 대사를 인용해서 대답했다.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기는 마찬가지” 지금 생각해보면 왠지 하찮은 변명 같긴 하다. 아무튼 당시의 내 모습은 누가 봐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었고 어둠속에 넘어져 일어날 줄 모르고 버둥대는 상황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내 속에서 썩어 들어가던 상실감을 들어낼 수 있었고 더 이상 질곡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걸어가야 할 길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변화하고 사라질 운명이며 그로 인해 세상 일체 모든 것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나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통렬한 외침이었다.
그 사자후는 나를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고 지금 이 자리까지 나를 이끌고 있다.
파계사에서의 행자 생활과 행자 교육 기간을 거쳐 인연의 끈은 나를 해인사로 풀어 놓았다.
해인사 산문을 처음 들어서던 순간이 떠오른다. 약간의 긴장감과 설레임, 두근거림과 기대감,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감정으로 가슴이 요동치던 그 순간, 사회에서 생활하던 때 팔만대장경과 성철 스님 이외에는 해인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라곤 없던 내 눈에 비친 도량은 웅장하고 약간은 압도적인 느낌이었다.
아무나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시던 어른스님의 말씀이 귓가에 웅얼거렸고 이상하게도 출가하면서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과 감정들, 회한, 상처, 후회와 분노의 편린들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튀어 올라왔다.
곧 도반스님들과 만나고 본격적인 승가대학 생활을 시작하지 3주 남짓 되는 이 시점에서 해인사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말하는 것은 섣부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정대불사, 강원 산행, 성지 순례, 대재 등의 굵직한 행사들을 거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거리던 모습이 이제 조금씩 무게감을 갖추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챙기기 못하고 긴장의 끈을 놓쳐버리면 경계에 끄달려버린다는 사실을 윗반스님들이 일러주셨다.
그런 의미에서 1학년의 분주하고 바쁜 생활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부분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스스로를 단속하고 대중 생활의 규칙을 익혀가면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를 자각해가고 있다.
‘우리’라는 정의가 가지는 긍정적인 힘들도 알게 되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 도반들 간에 서로 격려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 편안함과 안락감속에선 끈끈한 도반애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대중 속에서 느끼게 되는 소속감과 안도감이란 요소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불어 다양한 수업이 가져다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어에서 초기불교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아우른다. 철학과 문학 연습 등 새로운 분야와 전통적 주제인 치문과정이 공존한다는 것은 커다란 매력이다.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과제를 하고, 책을 읽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재미는 해인사 승가대학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바쁜 일상에 힘들다는 느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모든 경험은 지금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매일 새벽 눈 뜰 때 곁에서 느껴지는 도반스님들의 존재감이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듯이.
그리고 나를 괴롭히던 감정의 굴레와 기억의 조각들과 과거라는 이름 아래 담겨진 모든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다. 과거의 시간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 올 날들도 내가 억지로 조작할 수 있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모든 무게를 놓아 버리고 나의 번뇌를 부인하지도, 끌어안으려고도 하지 않고 걸어 나갈 때 비로소 가려진 길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실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잠시 지나가는 풍경일 뿐.
그것을 내게 각인시켜준 분이 부처님이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해인사의 넓은 품이 나를 새롭게 바꿔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아직 배워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고 이런 저런 고비들과 가파른 장애물들이 나와 도반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경계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결국 맞서야 할 상대는 나 자신임을 알기에 이제 더 이상 망설임은 없다.
해인사라는 단단하고 넓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부처님 전에 머리 깊이 조아려 감사드리며 오늘도 행전을 다시 챙겨 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