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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에 걸친 인연의 고리-화성유품(化城喩品) 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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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0년 12월 106호
ㄱ. 대통지승불의 성도
개권현실을 이론으로 설하신 법설주(法說周)에서 그것을 이해한 사리불에게 수기(授記)가 행해졌듯, 비설주(譬說周) 또한 수기품 제 6에서 가섭․수보리․가전연․목건련에게 성불의 예언(記)을 주셨던 터이나 생략하고, 시선을 인연주(因緣周)로 옮겨 화성유품을 살펴볼 때, 먼저 부당히는 것은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야기다. 그리고 그 부처님이 얼마나 아득한 옛날의 부처님인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삼천진점겁(三千塵點劫)으로 일컬어지는 비유가 설해졌다.
ꡒ비구들아! 저 부처 멸도하심 아주 오래니, 비유컨대 삼천대천세계 모든 지종(地種)을 설사 사람 있어 갈아서 먹 만들어, 동방의 일천 국토 지난 다음에 미진(微塵)만한 점을 하나 떨구고, 또 일천 국토 지난 다음에 다시 한 점을 떨어뜨려, 이리 되풀이해 지종의 먹 다한다면, 너희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나라들을 수학자나 그 제자가 끝가는 데 짐작하여 그 수 능히 알 수가 있겠느냐.ꡓ
모르겠다고 제자들이 대답하자, 부처님은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ꡒ비구들아. 이 사람이 지나간 국토-점을 떨어뜨렸거나 아니했거나 그 모두를 뭉개어 티끌 만들어 티끌 하나를 일겁(一劫)으로 친다 해도, 저 부처님 멸도 하신 지는 이보다 더하기를 무량․무변 천만억 아승지겁이니, 나는 여래의 지견력(知見力) 탓에 멀고 먼 그때 보길 오늘같이 함이로다.ꡓ
결국은 무한하다고 밖에는 이를 수 없는 먼먼 과거의 부처님이심이 되는데, 그 수명이 오백사십만억 나유타겁(那由他劫)이셨던 것은 그렇다 쳐도,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서 모든 번뇌를 깼음에도 불구하고 성도까지는 십겁이 걸렸다고 밝히시고 있다.
ꡒ그 부처님 본디 도량 앉으사 마군(魔軍) 깨시고 거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게 되셨으나 막상 제불(諸佛)의 법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리하여 일소겁(一小劫)에서 십소겁(十小劫)에 이르도록 결가부좌해 몸과 마음 움직임 없으시되 제불의 법은 나타나지 아니했고…….ꡓ
ꡒ비구들아. 대통지승불이 십소겁 찬 뒤에야 제불의 법 나타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으시니라.ꡓ

ㄴ. 왜 십겁이 걸리셨나
대통지승불은 ꡐ도량에 앉으사 마군을 깨신ꡑ 것으로 되어 있는데, 부처님의 성도하시는 장소가 도량이며, 성도에 지장을 주는 번뇌 따위 온갖 악이 마군이라면. 이미 도량에 앉아 마군을 깨신 처지에서 왜 그토록 성도가 지연되었느냐 하는 것은 수수께끼가 아닐수 없다. 그러기에 선문에서도 이를 문제삼은 일이 있었으나, 홍양․임제 같은 선사가 그것이다.
흥양청양(興陽淸讓)은 위앙종의 법맥에 속하는 분이거니와, 그에게 한 선객이 물었다.
ꡒ대통지승불은 십겁이나 도량에 앉아 계셨으나, 불법이 나타나지 않아 성불하지 못하셨다는데,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ꡓ
ꡒ그대의 질문이 매우 분명히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ꡓ
도량이 부처님의 성도하시는 곳을 이르는 말이라 해도 엄밀히 따지면 그 장소가 도량인 것은 아니니, 장소가 생도를 가져온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이 밝힌 대로 결국은 마음이 도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마음을 지닌 점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므로 질문한 선객도 본질적으로는 어엿한 부처님이신 것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불의 행적을 문제삼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므로 이같은 태도를 취하는 바에는, 영구히 성불할 수 없으리라는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객은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물고 늘어졌다.
ꡒ이미 도량에 앉아 계신 터에, 어째서 성불하지 못하신 것입니까.ꡓ
ꡒ그가 성불하지 않기 때문이다.ꡓ
흥양선사에 있어서는 법신불․본지불(本地佛)이 대통지승불이었던 것이니, 그런 절대 자체에 있어서야 성불이라는 말조차 용납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임제선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는 이가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법이 임제록에 보인다.
ꡒ대통(大通)이란, 자기가 도처에서 만법의 자성 없으며(無性) 형상 없는(無相) 사실에 통달함을 이른다. 지승(智勝)이란 어떤 곳에서건 의혹하지 않아서 무엇하나 얻음이 없음을 이른다. 불(佛)이란 마음의 청정한 광명이 법계에 투철함을 이른다. 십겁을 도량에 앉으셨다 함은 십바라밀이 이것이다.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함은 부처는 불생불멸의 것이요 법 또한 그렇거니, 어떻게 다시 나타날 것이 있겠는가. 성불하지 않으신다 함은 부처인 터에 다시 부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ꡓ
임제선사는 대통지승불을 먼 과거불이 아닌 우리들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법신불인 우리가 성불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니, 성불 안한 것이 도리어 법신불로서의 우리 모두의 본래면목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ꡐ십겁이 찬 뒤에는 보리를 얻었다ꡑ고 하신 것은 무엇인가. 홍양․임제의 처지에서 볼 때는 이 성도는 본지(本也)의 부처님이 중생 앞에 수적(垂迹)의 몸을 나타내심을 뜻해, 도리어 성불 안하심이 근본이요 성불하심은 부차적(副次的)인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이 부처라는 것은 본질이 그렇다는 하나의 이(理)에 불과해서, 수행으로 그것을 개발
해 완성으로까지 이끄는 성불이야말로 귀중하고, 이것에 비해 성불하지 못한 상황은 열등할 수밖에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처와 중생을 분별하고 들어가는 중생 측의 견해다. 이런 견해에서는 한에는 수행은 수를 헤어 무한에 이르려는 노력과도 같아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이니, 진정한 성도는 처음부터 부처였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이것이 원교(圓敎)요 돈오(頓悟)에 해당할 터이나, 그런 처지에서는 십겁이나 성불하지 못하신 이 일에서 끝없는 것을 시사받을 수 있을 것이다.

ㄷ. 권청(勸請)
대통지불의 성도 전후의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건 그 성불이 실현되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부처님의 십육왕자(十六王子)였다. 그들은 아버지의 성도하심을 듣자 곧 불소(佛所)를 찾아가 예배․찬탄하고 ꡐ어둠에서 어둠으로 들어가는ꡑ 중생들을 위해 설하시도록 요청했다.
또 반응을 보인 것은 범천왕(梵天王)들이었으니, 경은 그 서두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ꡐ대통지승불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으실 때, 시방(十方)의 방위마다 오백만억 불세계(佛世界)가 여섯 가지로 제가끔 진동하고, ……또 그 국토의 채천(諸天)의 궁전 내지는 범궁(梵宮)까지 여섯 가지로 진동을 일으키며, 큰 광명 널리 비춰 세계에 가득하여 제천의 광명의 미칠 바 아니더니라.ꡑ
그래서 빛의 근원을 찾아 나서서 시방으로부터 범천왕들이 모여들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설법하실 것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면 십육왕자와 범천왕들의 권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생을 그 지혜의 결핍으로 하여 어둠(無明)으로 비유한다면, 부처님은 절대적 지혜이신 점에서 빛 자체이시다. 그리고 이런 빛 자체이신 부처님이 중생의 세계에 임(臨)하심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신 광명이겠으나, 자연의 광명과 부처님의 광명에는 차이가 있다. 가령 태양의 광명이라면, 비출 때에는 일제히 비추어서 상대의 의사는 무시된다. 설사 햇빛에 비쳐지기를 바라지 않는 물체나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이 고려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부처님이 비추시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므로 거부하는 자까지 비추지는 못하시며, 반드시 그 빛을 바라는 자만을 비추시되 그 요구의 강도(强度)만큼 밖에는 비추지 못하신다는 제약이 따른다. 그러기에 중생 측의 요구가 있을 때만 설법하실 수 있는 것이니, 십육왕자와 범천왕들의 권청이 지루하리만큼 반복해가면서 서술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 이것이 성도하신 석가여래께서 설법을 주저하셨을 때, 범천이 나타나 설하시도록 권청했다는 고사에 유래된 발상임은 이를 것도 없다. 그리고 범천왕이 대통지승불을 찬탄한 게송에 나오는,
ꡒ원컨대 이 공덕이 모든 중생들에 미쳐 저희와 그들 모두 불도(佛道) 이뤄지이다.ꡓ
라는 말에는, 사홍서원의 정신이 넘치도록 나타나 있는 점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설법 쪽으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