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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영월암 보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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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정영 2010년 05월 339호
찬 아침 공기 속에서 설봉산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가지마다 연둣빛 물이 오른 봄, 새들의 지저귐도 연둣빛으로 맑다. 그래서일까, 산길에서 만난 영월암으로 향하는 신도들의 걸음도 날래고 힘차다. 절에 다다르자 64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영월암의 오랜 이야기를 품은 듯 서 있는데, 나이가 뭐 대수냐는 듯 작설 같은 새싹을 잔잔히 밀어올리고 있다.
영월암은 산중의 절인데도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인다. 기도를 하러, 초파일 등 만들러, 산보 삼아 찾아 온 이들로 도량이 소란스럽고 웃음소리로 가득하니 절집이 잔칫집처럼 흥겹다. 꽃들도 만발하니 이보다 더 화사하고 정겨울 수 없다. 보문스님은 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짓하신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종교 지도자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지요. 신도들이 옳고 그름에 혼돈할 때 바른 길을 제시해 주기도 해야 하고, 어떤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인지 척도를 제시해 주어야 하고, 신도들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공헌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하고 크게는 나라에도 도움이 되어야지요.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그만큼 의식 수준도 높아졌기에 신행 활동도 달려졌으니 그에 부흥할 만한 스님의 역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님이 2009년 봄, 처음으로 주지 소임을 맡아 영월암에 와서 오늘까지 지내며 느낀 것이다. 10년 넘게 선방에만 다니던 스님에게 주지 소임이 맡겨졌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주지 소임이라는 게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나 비중이 크고 거기에 따른 책임이나 가치관이 뚜렷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갖추지 못해 소임을 차마 맡을 수 없어 물리치고 한 달 간 숨어 있었단다. 선방에서 가서 공부를 더 할 생각만 하다가, 문득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생각하게 되었단다. 사교반 때 같이 살던 도반 스님과 안 좋은 일이 생겨 걸망을 싼 적이 있었는데, 걸망을 싸놓고 생각해보니 책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경계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지내는 것도 큰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직 공부가 부족하구나 싶은 생각에 걸망을 풀었단다.
“마음 공부 하는 이 길에선 공부 아닌 것이 없고 선원에 집착하는 것도 문제가 있구나 싶어 소임을 보기로 결정하고 영월암으로 왔지요.”
그렇게 주지로 영월암에 살게 된 것도 1년이 훌쩍 넘은 지금 스님은 말씀하신다.
“선원에서 혼자 화두를 들고 진리의 영역으로 침잠해 가는 것이나, 깨달음을 중생과 함께 한다는 것에서 정진과 주지 소임이 동떨어진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또 다른 형태의 수행이라는 생각이다. 선원에서는 정중선靜中禪, 고요한 가운데 정해진 시간의 정진, 공양, 수행, 울력을 하며 진리를 탁마했으나, 현재는 동중선動中禪, 소임을 보면서 진리를 탁마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스님은 선원에서 살 때보다도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삶을 살고 있단다.
“선원에서 살 때는 내가 조금 퇴타해도 별로 표가 안 나요. 하지만 주지소임은 퇴타하면 금세 표가 나요. 내 자신 스스로에게 그렇고 소임에도 공백이 나 헛돌아가는 걸 느끼지요. 주지 소임은 현대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이 중요해요. 그러다보니 또 다른 측면에서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스님에게 있어 그 살얼음판의 소임을 살고 있는 영월암은 인연이 깊다. 스님이 열 살 때 입산한 절이 바로 영월암이기 때문이다. 덕유산 줄기에서 자란 스님은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영월암 큰 스님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절집에 들었단다. 그런데 그 어린 열 살 소년의 마음에 뭐가 그리도 좋았던지 영월암에 오자마자 너무 좋아서 법당에서 춤을 추었단다. 그러니 그때의 그 법당에서 지금 스님은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잠이 많은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님들 따라서 새벽도량도 졸졸 따를 정도로 좋았어요. 예전에는 이 산에 찻길도 없이 오솔길만 나 있었는데 시내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고, 저 은행나무 밑에서 다람쥐들과 놀며 자연과 사람 사이에 벽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어요. 좋은 환경, 어른 스님들의 철저한 교육 속에서 자랐지요.”
스님이 친구집에서 놀다가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큰 스님은 은행나무 쪽 툇마루에 앉아 기다리셨단다. 전기도 없던 시절, 질화로에 된장찌개를 올려 스님이 밥 다 먹는 것을 보고나서야 들어가셨단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어 매를 드신 날은 꼭 당신 곁에 스님 이불을 깔아 같이 잤단다. 그 스님이 77년도에 돌아가셨을 때 보문스님은 삼일 밤낮을 울었단다.
부모 잃고 어린 나이에 절에 오게 되면 사랑이 부족해서 행동이 모날 수도 있었을 텐데, 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친구들은 스님이 절에 사는지 모를 정도로 평범하게 자랐단다. 오히려 그 당시 보통 가정의 아이들보다 더 좋은 가르침 속에 자랐단다.
“제가 이곳 주지로 오게 되었을 때 노스님들께서, 너 잘 살아야겠다 하시대요. 입산한 절에서 주지로 산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니니까요.”
그만큼 스님은 영월암 주지로써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주지 소임을 맡은 것에 대한 책임감만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입고 큰 것이 내 삶 속에 녹아 있어서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그것은 진리나 수행 같은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다. 법당에서 춤을 추던 열 살 소년이 지금 불혹의 나이를 넘어 주지 스님이 되기까지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다. 그 세월 동안 스님이, 신도들에게 받았던 동아전과나 철마다 받았던 새 옷들, 그리고 스님이 걸었던 걸음과 흘렸던 눈물과 품었던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 부처님 앞에 가만히 두 손 모으는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스님이 되는 게 꿈이었고, 누가 와서 밖에 나가 살자고 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출가 전에 대학에서 공과대를 다녔는데, 어딜 둘러봐도 가고 싶은 길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출가했고 동국대에 들어갔다.
“어려서 위인전을 많이 읽었는데, 아무리 봐도 부처님만한 분이 없어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사는가 생각했을 때, 부처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제 교과서예요.”
그래서일까, 스님은 어느 경전보다도 <부처님의 생애>를 가장 자주 읽는다.
“읽을 때마다 느낌도 다르고 그때그때마다 다시 알게 되는 부분이 달라요. 늘 마시는 차라도 늘 맛이 다르듯이.”
그리고 스님은 초기경전을 자주 읽는다. 신비화, 절대화된 북방불교와는 달리 초기경전 속의 부처님은 실생활 속에서 자상하고 자비로우며 실질적인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삶은,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과 같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행복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고통을 야기하는 방향을 저버리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그것이 사회 기존의 관습, 관념, 사상 체계를 타파해 진정으로 개인적인 행복만이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국가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한 부처님의 삶은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요. 살아 있는 가르침이지요.”
그러면서 스님은 말씀하신다. 한국불교 1600년의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조선의 암흑기를 견뎌오면서도 살아 있는 종교로 면면이 이어온 것은 불교의 대단한 힘이라고. 부처님의 자비를 느끼고 믿고 행복한 길로 갈 수 있도록 제시해 무지렁이 할머니들도 절을 찾는 것은 불교의 내재된 역량이라고.
“기복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는 것이냐 했을 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에요. 시골 할머니들이 절에 올 때, 정성들여 목욕재개하고 아끼고 아낀 쌀 한 되를 들고 부처님께 오는 것인데….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불교를 어떻게 다시 펼쳐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스님들이 상당히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스님과 말씀을 나누는 동안에도 신도들이 계속해서 스님 방으로 찾아든다. 스님 말씀처럼, 신도들 마음의 혼돈에 길을 제시해 주는 것도 그들의 대소사를 챙기는 것도 주지의 소임인 것. 그런 스님께 여쭙는다.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시는가?
“인도에 ‘듀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처한 현실과 기대하는 현실 사이의 차이, 즉 고苦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양을 줄이려면 내가 처한 현실을 상승시키거나 기대치를 내려야겠지요.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높인다고 해서 해결이 안 돼요. 기대치도 같이 높아지니까. 방법은 단 한 가지, 자기 욕심을 줄이는 수밖에 없어요. 부처님께서도,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단언하셨지요.”
작은 일에도 행복해 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란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사소한 것들이 어쩌면 행복의 단서를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그걸 경솔히 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실제적으로 행복은 일상사에서 찾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못 찾고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이다.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거기에 주목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늘 생각하신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통해 하루하루 부처님처럼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 자체가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면 스님을 만나는 모든 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그것이 원이라면 원이라고.
스님과 자박자박 도량을 걷는 동안 목련꽃 잎이 뚝뚝 진다. 이제 이파리를 큼직큼직 키워 올리려고 저토록 꽃을 떨구어 내는가보다 하는데, 그 목련 나무 아래서 합장하던 스님이 저 멀리 보시더니 큰 소리로 ‘보리야!’ 부르신다. 흰 개가 성큼 달려와 스님 품에 안긴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 전의 열 살 소년이 큰 스님 품에 쏙 안기는 것만 같다. 그 위로 산수유 꽃잎이 난분분히 날린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의 봄날을 그린 한 장의 수묵화 같다.
그 풍경 속에서 스님의 말씀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니, 느릿느릿하고 나긋나긋한 말씀 중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행복’이다. 세상의 모든 새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울듯, 행복한 자만이 ‘행복’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