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논리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믿음이 따듯한 것이라면, 논리는 차가운 것이 아닌가 한다.
믿음은 논리를, 논리는 믿음을 서로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믿음은 언어를 밀어내는 듯하고, 논리는 언어를 잡아당기는 듯하다.
믿음은 이상처럼 높아 보이고, 논리는 현실처럼 가까워 보이는 듯하다.
믿음은 논리라는 이름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기도 하는 듯하다.
논리는 믿음이라는 이름 앞에서 처참히 무시를 당하기도 하는 듯하다.
믿음이 로맨스라면, 논리는 에로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은, 불가능이란 말을 가능이라는 논리로 바뀌게 해주기도 하는 듯하다.
논리는, 믿음이 가고자 하는 길에 바른 멍석을 깔아주기도 하는 듯하다.
믿음이 어머니라면, 논리는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때로는.
아버지가 믿음이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논리가 되기도 하는 듯하다.
믿음은 방패, 논리는 창.
믿음은 불같은 번뇌를 막아주는 방패.
논리는 얼어붙은 마음을 깨주는 창.
믿음에 대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제목을 ‘나무아미타불 공양주’라고 해야할 것 같다.
옛날, 동양의 어느 나라, 어느 절에서 공양주를 수십년 한 노파가 살고 있었다. 노파는 절 터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세겨진 비석의 말만을 외우며 밥을 지었다. 노파는 ‘나무아미타불’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기만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밥도 잘 되고, 하루가 편안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타지방에서 온 등산객이 등반을 와서 물한잔을 얻어마시는 일이 있었다. 그때 등산객은 노파의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외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나무아미타불, 이 무슨 말인고...’하고 생각해보고 있는데, 눈앞에 비석 하나가 보였다. 그 비석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본 등반객이 생각하가를,
‘남쪽 남, 없을 무, 아...미...타...부처님...... 아! 남쪽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없다!...인가?’
등산객은 자기 생각이 맞는지 궁금하여 노파에게 물었다.
“저기 써져있는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입니까?”
노파는 아무말이 없었다. 이때 대뜸 등산객이 말했다.
“아니, 남쪽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노파의 속이 철렁했다. ‘남쪽에는 없다구..아미타부처님이....?’
곧 등산객은 떠났고, 이런 일이 있은 후, 노파는 밥을 태우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맹목적 믿음과 괴변적 논리는 짝꿍인 것일까.
진리라는 것은 믿음과 논리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닌가.
묘妙한 자리가 진리의 자리는 아닐까.
그래서 화엄경의 마지막 수행 단계가 묘각妙覺인 것이 아닐까.
묘한 도리를 알고 실천하는 그 자리가 참된 불교 자리일 것이다.
믿음이 항문이라면, 논리는 입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항문과 입술은 어머니 몸속에서 한날 한시에 생겨나는 것임을.
그대는 알고 있었는가.
때로는, 말을 함으로 인하여 그 의미가 상실되는 것도 있는 듯하다.
예컨대, 믿음이라는 것도 그런한 것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때로 믿음을 말하게 되면, 허공 한 가운데 믿음이 있는 듯하고,
어찌해야되는지 스스로 발만 동동굴리는 일이 일어나곤 하지는 않았던가.
논리에 대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제목을 ‘콜레라균을 마신 학자’라고 해야할 것 같다.
옛날, 서양의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콜레라 균’이 처음 출현하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때 학자들 간에는 균에 대한 의견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전염병이다. 다른 하나는 전염병이 아니다. 후자後者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콜레라 균이 담긴 용기容器의 내용물 마셨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결말을 얘기하자면, 균을 마신 학자는 전염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위산이 많아 나왔는데, 그 위산에 ‘콜레라 균’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였다.
믿음이 좌절됐을 때, 믿음은 논리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 논리에 절망하게 됐을 때, 논리는 믿음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바른 믿음은 논리에 확신을 주며, 이상적 논리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준다.
우리가 걸을 수 있는 이유는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걷기전에 먼저 배우는 것이, 잘 넘어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던가.
겨울 스포츠 종목인 스키를 처음 배울 때 배우는 기술이 잘 넘어지는 법이 아니었던가.
로봇이 만들어지게 되던 초창기때 이야기이다. 그때 로봇은 한 두 발자국도 못 걸러서 넘어졌다. 그 원인은 잘 걸을 수 있도록만, 프로그램을 해놓은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넘어지는 프로그램도 넣게 되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넘어질듯 하면서도 잘 걷게 되는 로봇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그러기에 걷는 것과 넘어지는 것은 둘이 아닌 것이다.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넘어지는 것은 잘 걷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잘 걷기 위해서는 넘어져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이름앞에서 논리는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욱 굳건이 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논리라는 이름앞에서 믿음도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확신을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걷는 다는 것은 넘어진다는 전제하에 걸을 수 있는 것이고, 넘어진다는 것은 걸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넘어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믿음은 논리 밖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논리 안에 있기도 하다.
논리는 믿음 밖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믿음 안에 있기도 하다.
믿음과 논리 그 넘어에 참된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자유로운 행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