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현대화의 명분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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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정
1990년 12월 106호
명분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 구체적 실천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우리 불교계에 현대화니 대중화니, 그에 대한 반성과 희망적인 추진계획이니 하는 따위의 명분론들(?)이 등장해오던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흡사 불교계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처럼 그럴듯한 아이디어와 사업거리를 내놓고 선전을 벌여왔다. 물론 어느 시기에나 그 처한 형편과 관계없이 그런 주장들은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고, 많은 불교인들로부터 공감을 얻어왔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의 대부분은 쳇바퀴 돌 듯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그 추진 실적도 미약할 뿐이다. 대부분 공허한 명분으로 남아 있다가 틈만 나면 먼지를 털고 새로운 이슈처럼 등장한다. 가령 현대화하려면 경전을 번역해서 적극적으로 유포하여야 하고, 그러려면 종단이 나서서 돈도 대고 제도도 만들어야 하고, 번역할 사람과 가르칠 사람을 길러야 하고, 그러므로 교육 기관을 강화해야 하고, 그러니 또 종단과 스님들을 탓하고, 이렇듯 난마처럼 얽혀 있는 숙제 앞에서 모두들 한숨을 쉬고 만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움직여왔던 명분론이 이 난제의 벽을 넘어서는데는 상당한 한계를 느끼고 있다. 오로지 종단과 스님들에 대한 도매금의 손가락질만으로 자포자기한다.
물론 우리 불교계의 현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나 그 사람들에게 원인의 일단을 제공하고 있는 종단(혹은 승단) 중 필자는 어느 한 편을 두둔하려는 심정이 조금도 없다. 다만 거창하고 요란스러운 구호와 그 구체적 실천 사이의 벽을 허무는 것에 대해 이 한해가 또 다시 가기 전에 여기에 말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불교방송이 지난 5월에 개국을 맞은 것은 우리 불교계의 역사적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좀 늦은 감이 있어서 쑥스럽지만, 우리가 비로소 해냈다는 자긍심을 한껏 고양시켜 주었다. 더욱이 신자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고 태어난 이방송은 신생아 치고는 건강하다. 불교방송의 개국은 돈과 종단에 대한 핑계로 일괄하던 지지부진한 사업들이 이처럼 훌륭히 성취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겨주었다.
그렇다. 우리도 해낼 수 있다. 현대화와 대중화의 구호와 함께 산적한 저 많은 과제들을 우리는 끈질긴 투쟁으로 풀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현대화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매달 것인가? 누가 이 좋은 구호와 명분에 내실의 서까래를 올릴 것인가? 이 뒤헝클어진 실타래의 가닥을 어떻게 찾아 낼 것인가?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심사숙고해야 할 처지이다. 그럼으로써 보다 큰 추진력을 갖고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차례이다.
비근한 한 예를 들어보자. 방송을 시작하니 노래가 많아야 되는데, 찬불가 레코드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청취자는 찬불가를 자주 틀어달라고 아우성인데 같은 노래를 매일 반복해 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듯한 명분과 의욕만으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겠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저명한 대학 교수 한 분이 대장경을 전산화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얼마나 좋은 명분인자 그러나 우리나라의 불교계 인사들은 누구도 이 제안에 숨겨진 함정을 알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박수를 치며 협조를 다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제안을 던졌던 미국인 교수의 순수한 열정과 이에 동의한 우리나라의 선구적 불교계 인사들의 헌신적 협조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무릇 사업은 그 성공을 기약하며 추진되고, 참여 결정까지의 숙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당연히 전산화에 관한 일이나 전산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자문이 선행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에서의 한문 한글 코드와 우리나라에서 채택해 쓰고 있는 한문 한글 코드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컴퓨터 데이타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출력될 리가 만무하다. 이 하찮은 사실을 왜 등한히 하였는가?
그러므로 필자는 구호보다는 내실을 다지자는 평범한 이치를 여기서 새삼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골라서 조용히 추진해 가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감을 얻으면 동지를 규합하고, 그 목표를 향해 두 말할 것 없이 실천해 가는 것이다.
불교방송이 지금 안고 있는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안과 밖에서 조여오는 기대와의 싸움이다. 이제 신생아가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미명의 기대는 머지 않아 원망과 탄성으로 바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방송이 갖는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보다 질이 높은 방송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질을 찾는 방송인의 앞에는 푸성귀가 무성하다. 방송은 불교인만의 것이 아니다. 불특정다수의 청취자에게 불교라는 이름을 갖고 찾아간다. 그러므로 불교계 내부의 아마추어리즘에 의해 방송이 운행될 수 없다. 다른 방송사보다 훨씬 열악하기만 한 환경을 감당해가고 있음을 이해해주고, 우선은 무성한 푸성귀를 제치고 싱싱한 새싹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이것은 이래야 되고, 저것은 저래야 된다는 등의 설왕설래 끝에 배는 결국 산으로 올라가고 만다. 또한 목청 돋궈서 종단과 스님들에게 손가락질해봐야 결국은 자포자기만을 쓰라린 추억으로 남긴 채 자신의 얼굴로 되돌아 오는 침을 맞게 된다. 그저 스스로 실천해 나아가는 것으로 불교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다.
우리는 이처럼 음지에서 조용히 실천행을 닦다가 괄목할 만한 결과를 안고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보고 있지 않은가? 불교현대화의 과제를 포함한 무릇 거창한 명분들이 암초와 만나지 않고 순항하려는 데에 지금 이 시점에서의 유일한 항로가 있다면, 그것은 큰 예산과 제도와 의식의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의 부르짖음만이 아니라, 손쉽고 자그마한 것부터의 실천이다. 실천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추진할 뿐이다.
이 한 해를 보내면서 필자는 이런 상념들로 반성과 희망의 밤을 맞는다. 각자의 구체성과 실천력이 살아있는 다양한 사업들이 우후죽순처럼 각자의 손 안에서 자라나 이 예토를 빛내 주고, 그런 연후에 이 사업의 결과들이 모여 저 불교 현대화란 험난한 벽을 허물어뜨렸다는 박수가 온 나라에 번져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부디 새해에는 떠들썩한 명분 뒤의 안일한 핑계를 벗어나 차분한 실천으로 돌아가기를 거듭 간구한다. 저 구두선 같은 허명의 손가락질을 이젠 거두어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