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중앙 일간지의 종교기자들이었던 우리 일행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기왕에 누구누구인지 밝힐 필요할 것 같다. 명색이 종교담당 기자라고 하면서 세계적 명찰인 해인사를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하면 체면문제이므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단합대회 겸 해인사 견학을 계획하였다. 여기에 평소 중앙일간지의 종교기자들과 담화하기를 즐겨하셨던 지관智冠 스님의 주선으로 해인사 방문이 실현될 수 있었다. 참여자는 신아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대한일보의 담당기자들이었다. 마중 나오신 어떤 스님에게 금야의 숙소가 하처냐고 문의하였던 바, 홍도여관이라면서 앞장서서 안내하였다. 우리는 홍도여관이라는 곳이 절 아래의 관광지에 있는 수많은 숙박업소 중의 하나인줄 알았다. 그런데 안내 스님이 계속 절 쪽으로 올라가며 인도하시기에 ‘아, 늦었지만 우선 절에 들려서 부처님께 문안인사를 드린 후에 여관에 좌정하려나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일주문을 지나자 오른쪽에 나즈막한 적산 가옥같은 집이 나타났다. 홍도여관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니, 홍도야 울지마라의 홍도가 해인사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홍도여관이라고 했을까?’라고 궁금하게 생각하였더니 안내 스님이 ‘그 홍도가 아니라 붉은 홍紅자와 파도 도濤자의 홍도紅濤올시다. 늦가을이면 가야산의 단풍이 마치 붉은 파도처럼 출렁대므로 그런 이름을 붙인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홍도여관은 일주문을 지나서 있으므로 이미 속세를 떠난 경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과연, 밤중만 하여 사방이 적막한데 간혹 이름 모를 산새들이 무슨 긴한 사연들이 있는지 서로 연락하는 소리만 들렸다. 방마다 전등은 설치되어 있지만 백열등의 환한 불빛 보다는 등잔불의 어스름한 기운이 더 제격이라고 생각했는지, 방마다 옛날 등잔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튼 창호지 문 밖으로 붉은 단풍의 파도가 어느덧 밀려올 것만 같은 밤이었다! 우리 일행은 자정 무렵까지 지관스님과 또 한분의 스님과 함께 불교입문 강좌를 열심히 받은 후 잠을 청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니 절에서 아침 공양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천왕문을 거쳐 드디어 절에 올라갔다. 주지스님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밥상이 생각 밖으로 조촐하였다. ‘맨날 이렇게 잡수십니까?’라고 문의하였더니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점심때는 좀 더 신경 을 써서 능력을 부려 보라고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우리 일행은 오전 중에 승가대학을 비롯하여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장경각을 두루 관찰하였다. 해인사에는 승가대학이 있어서 전국의 젊은 승려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학문을 정진한다고 했다. 과연, 넓은 방에서 불경을 강론하는 소리가 낭랑했다. 한참 후에 쉬는 시간인지 학생스님들이 우루루 밖으로 나왔는데 백명도 훨씬 넘는 것 같았다. 가야산 해인사의 역사와 현황 등에 대하여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굳이 재탕코자 하지 않겠으며 다만, 몇가지 인상만을 기술코자 한다.
나이가 들면 어디를 방문했던 기억 중에서 무얼 먹었는지 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한 연고로 우리 일행이 나중에 서로 만나 해인사 방문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면 다른 것은 생각이 나지 않고 다만 점심을 아주 잘 먹었다는 것만 생각이 나서 대화의 중심으로 삼기가 일쑤였다. 넓은 상에 수많은 반찬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모두 식물성이었다. 육류는커녕 그 흔하다는 멸치 한 마리도 없었다. 그러나 보라! 산채의 진수를!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온갖 산채와 두류식품 및 소맥가공식품을 정성과 기술로써 요리하여 진설하였으니 참으로 대단하였다. 무슨 넓은 나무 잎을 콩기름에 튀겨 바삭바삭하게 만든 반찬도 기억나며 더덕을 이리저리 무친 것도 기억이 난다. 두부 요리도 두서너가지는 되는 듯 했다. 아무튼 대단한 식단이었다. 모두들 감탄을 연발하며 가까스로 점심 공양을 마쳤다. 우리는 내친 김에 주방에 대한 궁금증으로 부엌을 구경했으면 좋겠다고 주장하여 부엌을 관람하게 되었다. 커다란 가마솥으로 밥을 짓는데 장정 스님들이 땀을 흘리며 큰 삽으로 밥을 퍼서 나무통에 담고 있었다. 한쪽에는 참으로 구수한 냄새의 된장국이 연못처럼 큰 양품에 담겨 있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삽으로 밥을 푸는 것은 보았는데 해인사에서 다시 그 모습을 보게 되어 감개가 무량했다.
우리는 오후 늦게 동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일정이어서 여유가 있었다. 오전에 절 구경은 다 했기에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우리 일행 중에 누가 ‘아이구 졸려! 점심을 너무 잘 먹었더니 졸음만 오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리 일행의 또 다른 사람이 ‘아까 부엌 쪽에 있는 어떤 집의 처마 밑에 탁구대가 놀고 있던데 우리하고 스님 대표하고 탁구나 한판 하면 어떨지요?’라고 제안하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갑자기 탁구에 열광하여서 틈만 있으면 탁구장에 가서 사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러자 주지스님께서 슬며시 웃으시면서 ‘그건 곤란할 겁니다. 아, 글쎄 탁구팀을 구성하였더니 젊은 스님들이 어찌나 힘들이 좋으시던지 오락으로 탁구를 하도록 했더니 탁구공을 자꾸 깨트리는 바람에 계속해서 탁구공을 댈 수 없어서 이젠 그만 중지시켰지요’라고 말씀하시었다. 이게 무슨 얘기인고 하니 하도 탁구 빳다로 탁구공을 힘차게 내려치는 바람에 공들이 번번이 깨져서 경제적 이유로 탁구를 중지시켰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가에 무슨 운동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젊은 스님들은 여가에 산을 타는데 하도 숙달되어서 다람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산을 잘 탄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리 일행 중에 또 누가 ‘그러면 저쪽 계곡 쪽으로 축구장 같은 것이 있던데 축구나 간단히 한번 하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아, 그거 좋지요’라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해인사 스님들과 대구 동촌비행장의 공군장병들과 친선을 위해 축구시합을 했는데, 스님 팀의 어떤 선수가 골문을 향해 하도 공을 세차게 찼던지 골키퍼가 공을 가슴에 받고나서 뒤로 넘어져서 결국 골인이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공군 골키퍼는 가슴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헉헉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어 결국 중간에서 게임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훌륭한 축구팀이라면 공연히 여기까지 와서 그분들과 대적하여 부상을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축구경기 제안을 철회하였다. 얼마 후 서울에서 지관스님을 만날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말로 ‘해인사 축구팀은 어떻게들 지내나요?’라고 물었더니 ‘축구공들도 남아나지 않아서 럭비공을 사주었는데 럭비공은 한번 차면 아무 방향이나 제멋대로 굴러가는 바람에 서로 공을 잡느라고 다투다가 여러 명이 다치기도 했다’는 재미난 얘기를 전해 주시었다. 그 후에는 시절이 수상하여서 이제껏 다시 해인사를 찾아가지 못하여 축구팀이건 탁구팀이건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어느새 40여년이 훨씬 지났으니!
[사진] 앞줄 왼쪽으로부터 조선일보 이준우 기자, 신아일보 방창순 기자, 지관스님, 해인사 스님, 동아일보 이용수 기자, 경향신문 김치강 기자, 윗줄 왼쪽으로부터 서울신문 황석현 기자, 중앙일보 공종원 기자, 필자(대한일보 기자)
정준극/한국원자력협력재단 자문위원. 전 대한일보 문화과학부 기자로 재직했으며, 1973년부터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책임기술원으로 35년간 재직. 저서로는 비엔나 소재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비엔나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엮은 비엔나 워킹 투어(2009년, 한울출판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