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체중생이 병病이 들었으므로 나도 병이 들었으니, 만일 일체중생의 병이 없어진다면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생사生死에 들어가는 것이며, 생사가 있다면 병이 있는 것이니, 만일 중생이 병을 여의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장자가 외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이 병에 걸리면 부모도 아들을 따라서 병에 걸리고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의 병도 낫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아서 고통과 아픔에 허덕이는 모든 중생들을 사랑하기를 아들과 같이 하므로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들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다.
문병問病을 다녀오라는 위임委任을 받고 찾아온 세존의 제자들을 향해서 제일성第一聲으로 외친 Vimalakīrti(유마힐維摩詰)의 선언宣言은 중생을 살피는 보살의 각오와 자세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승불교의 진수眞髓를 함축하고 대변하는 명제銘題가 아닐 수 없다.
한량없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마음을 자애로운 마음, 자심慈心이라고 하고, 남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마음, 어떤 사람이 나쁜 일을 당하거나 몹쓸 병고에 시달린다면 그것을 나의 일처럼 가슴 아파하면서 그것을 없애주려는 마음, 비통한 마음으로 측은히 여기는 것을 비심悲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심을 부모나 원수의 차별 없이, 선량한 사람이나 악독한 사람에게 골고루 평등하게 무조건적으로 펼치는 것이 바로 대비심이다. 중생이 불행하다면 나 혼자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대비심을 갖춘 보살의 자세이다. 중생에게 모든 병고病苦가 없어질 때에 보살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으며, 불행한 중생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서 모든 중생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때에 보살 또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보살의 신념信念이다.
병고에 시달리는 중생을 보면 아들의 병을 함께 아파하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중생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불행에 처한 중생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불행을 나누는 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인 것이다. 그러므로 병고에 시달리거나 불행에 힘들어하는 중생이 계속되는 한 보살의 신음과 고통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살이 만약 고통과 불행에 힘겨워하는 중생을 만나지 못한다면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낼 인연이 없게 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지 못한다면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무외시보시無畏施布施)의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게 된다. 무외시를 보시하는 인연으로 모든 중생들을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시를 하면서도 마음이 어디에 걸리지 않고, 탐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바른 깨달음(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다.
보살의 환희행歡喜行이란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널리 베푸는 것이며, 베풀고 나서는 뉘우치거나 아까워하거나 대가를 바라거나 명예를 구하거나 자기 이익을 바라지 않으면서 다만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이롭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행을 배우고 생각하며 좋아하고 몸소 실천하며 다른 이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괴로움과 고통을 떠나 즐거움과 행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보면 보살은 곧 보시하여 그를 즐겁고 만족하게 한다.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이 와서 자신들의 고통과 가난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더라도 보살은 조금이라도 싫어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고 더욱 자비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들은 나의 복전福田이며 나의 선지식善知識이라고 여기면서 찾지도 않고 청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나에게 와서 나로 하여금 바른 법에(정법正法) 들어가게 한다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고통과 불행 속에서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중생을 복전이자 선지식으로 여기고 섬기면서, 비통한 마음과 애절한 심정으로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불행한 중생이 있는 한 행복을 바라지 않고, 아픈 중생이 있는 한 병고의 쓰라림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사명使命일 것이다.
혹독한 시련에 허덕이는 지구촌 곳곳의 참상을 바라보면서,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라고 돌리지 않고 국제적이고 전인류적인 구호와 복구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대처對處와 노력이 바로 보살도菩薩道의 구현이며 보살행菩薩行의 실천일 것이다.
비통한 마음을 지닌 보살을 절실하게 요구하는 지금, 이곳이 바로 보살의 도량道場이다. 도량을 장엄하는 보살의 도량度量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세간과 국토가 결정되고, 보살의 도량은 중생의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비통한 마음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