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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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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향기 - 김현주 / 대학생 2010년 02월 336호
해를 정리하는 연말이 다가오자 나는 새해에 품었던 다짐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여느 해와 다름없이 꿈을 이루기 위해 맹세했던 나의 계획은, 특히 2009년 올해엔 무척 버겁게만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나를 짓누르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타인과 자신과의 비교와 거기에서 나오는 패배와 절망감은 마치 내 한계점이 고작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내 자괴감을 입 밖으로 뱉어내고 나면 그것은 쓸데없는 자격지심으로만 나타날 뿐이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보면, ‘별거 아닌 건데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거야?’ 하는 생각이며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막상 혼자 남겨진 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나에게 닥친 문제를 풀기 위한 핵심에서 조금도 다가가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아무런 공식도 없이 시간 내에 풀어내야만 하는 수학문제 마냥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끝까지 붙잡고 있기에는 바짝바짝 마른 입술처럼 내 몸의 피도 모두 말라버릴 것만 같았다.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던 중 여름휴가 때 잠시 들른 해인사에서 처음 알게 된 템플스테이가 나의 흐트러진 감정을 다시 모으기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불자이셔서 자연스럽게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마치 내가 우리 부모님의 딸로 태어난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절을 자주 찾아가거나 열심히 불공을 드리는 편이 아닌데 꼭 시험을 볼 때면 부처님을 찾아, 온 마음을 다해 애원하곤 한다. 이런 염치없는 신도를 해인사 템플스테이에 받아주신 걸 보면 부처님께서는 나를 아직 곁에 두고 싶으신가보다.
한 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해인사 주차장에 내려 낯익은 산길을 올라갔다. 다행히 깨우침을 얻고자 신청한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 올 참이었기에 해인사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해인사에 도착하자 우선 법당에 가장 먼저 가고 싶었다. 나는 무엇보다 절에서 나는 향냄새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법당의 차가운 마루에 앉아 스님의 목탁소리와 함께 향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미처 집에 놓고 오지 못한 잡생각들이 마치 향 연기처럼 천장에 채 닿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산 속의 밤은 일찍 찾아왔고 평소와 다른 취침시간에다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려니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며 몸은 자꾸 힘이 들어갔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잠을 설치기를 몇 시간, 기상 시간인 새벽 3시가 금세 다가왔다. 차마 얼음장 같은 냉수로 희미한 정신을 깨우자니 자신이 없고, 대신 미지근한 물로 간밤의 피로를 녹아내려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진 않았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굳어있는 몸뚱이를 끌어올려 마당에 나가보니 새벽하늘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들 잠들고 있는 사이에 하늘이 몸을 웅크려 해인사를 감싸 안아, 멀게만 느껴졌던 별이 내 눈앞에서 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별들을 가까이에서 보니, 문득 이 별들이 제 무게를 못 이겨 하나 둘씩 떨어지게 되면 모든 별들을 어떻게 내 품에 안을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별 구경을 하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참가자 모두 하얀 김을 내뿜으며 새벽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첫째 날보다 둘째 날 일정이 꽤 빡빡했는데, 특히 108배는 해인사를 들어가기 전부터 걱정거리였다. 방학과 동시에 나의 나태함은 시작됐고, 무기력증은 극에 달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1200미터 오래달리기와도 같은 108배의 위엄은 나에게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의 무릎이 아직 꽤 쓸 만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새벽에 본 별들이 우주의 기운을 불어넣어준 탓인지 어느새 108배를 끝내고 숨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히려 참선시간과 발우공양이 생각보다 어려웠는데, 반가부좌를 틀어 앉아 한 시간을 버티기가 그토록 어려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통을 참으려고 다른 생각을 하려 할수록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이 자꾸 떠올라 고통은 배가 되었다. 겨우겨우 참선을 끝내고 아침 공양 시간이 되었다. 내가 너무 자만했던 걸까? 잔반찌꺼기를 씻어낸 청수물을 쉽사리 다 삼킬 수가 없었다. 반면 나와 함께 지원했던 친구는 발우공양만큼은 자신이 없다며 혀를 내두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밥을 받은 흔적도 없는 깨끗한 발우를 내보이고 있었다. 아침 공양을 끝내고 나자 금세 날은 밝아졌고, 태양은 그 많던 별빛들을 흡수하여 눈부시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모든 템플스테이 일정을 마무리하고 해인사를 나오는데 법고소리가 들렸다. 장엄한 법고소리와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향냄새에 비워뒀던 내 마음이 한껏 벅차올라 귀와 코는 해인사에 남겨두고 싶을 정도였다.
버스를 타고 대구로 올라오는 한 시간 동안 나는 해인사의 기운을 가슴에 담고 뻥 뚫린 마음에 다시금 온기를 불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평소와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큰 욕심 없이 찾아갔던 해인사는 결국 나에게 큰 깨우침을 주지 않았다. 대신 항상 타인과의 비교에만 전전했던 예전보다 지금은 나 자신을 더 깊이 있게 알아가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남들의 시선이 두렵고 그들의 발자국을 언제나 뒤쫓아 가기 바빴던 나의 어린 시절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별거 아닌 일에 눈물을 보이고 쉽게 무너지던 ‘루저’인 나는 급하게 내딛던 발을 한 발짝 도로 들여놓았다. 지금의 나는 조급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가진 가능성을 그 뿌리로 두어 다시 첫 발을 내딛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마음에 불안의 꽃이 다시 피어오를 때면, 어느 추운 겨울 광활한 우주의 수많은 별이 나를 향해 빛을 내뿜던 그날을 기억하며 나는 또 다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찾아 나서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