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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을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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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주명덕 1990년 12월 106호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한장 남은 달력을 쳐다보며 올해를 되돌아본다. 무얼 했던가. 연초에 마음 먹은 일은 얼마나 이루었는가…….
금년 연초에도 나는 큰 계획을 세운 바는 없다. 또 한 해를 보내면서 크게 ꡐ이 일은 못하였구나ꡑ 안타까워 한 바도 없다. 해마다 정월이면 ꡐ올해 한 해도 큰 탈없이 열심히 지내기를, 모두에게 감사하며 잘 지내기를ꡑ, 마음속 깊이 새기며 보냈을 뿐이다. 해마다 또 이맘 때 쯤이면 ꡐ아, 참으로 고맙게 잘 일년을 보내었구나.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ꡑ 라고 말한다. 그 말을 속으로 또 중얼거리고 지내는 나는 어느 새 오십 고개를 넘긴 나이가 되었다. ꡐ마흔에 매지근하고 쉰에 쉬지근하다ꡑ는 말이 있지만 ꡐ매지근ꡑ하지도 ꡐ쉬지근ꡑ함도 못 느끼고 오늘까지 왔다.
금년은 작년보다 산과 절을 못다니며 살아왔다. 왜 그랬을까, 모든 잡다한 일들이 나를 묶었는가 하면 일하고 돌아다니는 서울바닥이 나를 풀어놓아 주지를 않았다. 그렇게 일과 일에, 사람과 사람에 얽히면서 대부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몇 년 전에 산을 많이 다니고, 그것도 겨울산의 나목(裸木)들을 많이 찍기도 하고, 또 비탈에 뿌리내리고 자리는 숲속의 나무들처럼 자유로우면서도 고집이 세다하여 ꡐ잡목(雜木)ꡑ이라고 나를 부르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호칭처럼 작년에는 ꡐ잡목사진전ꡑ으로 잠시 바쁘기도 하였지만, 올해에는 잡목사진도 많이 못하고, 친구가 준비하는 ꡐ특별란 잡지ꡑ일을 함께 의논하면서, 그러다 보니 하루 해가 짧더라고 하면, 글쎄, 나의 연초 무계획에 맞는 말이라도 되는 것일지.

ꡒ그 사사로운 일로/정히 닦아 온 마음에/얼룩진 그림자를 보내지 말라. /그 마음에는 한 그루 나무를 심어/꽃을 피게 할 일이요/한 마리 학으로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할 일이다/대숲에/자취없이/바람이 쉬어가고 / 구름도 / 흔적없이 /하늘을 지나가듯/어둡고/흐린 날에도/흔들리지 않도록 받들어/그 마음에는/한 마리 작은 나비도/너그럽게 쉬어 가게 하라. /ꡓ
-辛夕汀 詩 「그 마음에는」 全文-

ꡐ대바람 소리ꡑ를 좋아하시던 이 시인의 시를 읽어본다. 한 20여년 쯤 전에 이 시인은 나의 졸저 사진집을 보서고는 자신의 시집에 붓글씨로 마음을 적어 나의 작업을 격려해주신 분이다. 물론 그분은 이제 안 계시지만, 문득 그 시절이 그리우면 그 분의 시집을 꺼내어 읽어 볼 때가 있다. 조금은 그 분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사진찍는 일 이외에 나는 짬짬이 음악듣기를 좋아한다.
ꡐ질리ꡑ가 부르는 옛날 판을 들으면서 녹차라도 마시고 있노라면, 머리 속과 마음이 청정해짐을 느낀다. 녹음기술도 좋지 않고 요즘의 CD처럼 맑고 세련되지도 않지만, 그 시절의 판에서는 순수함이 흐른다. 기교없는 아름다움이다. 좋은 음악은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준다.
수시로 내가 손에 들고 읽어 보는 ꡐ선(禪)의 황금시대ꡑ란 책이 있다. 마조스님과 그의 스승 회양스님과의 문답을 읽어본다.

ꡒ좌선을 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ꡓ
ꡒ부처되고자 합니다.ꡓ
ꡒ앉아서 명상하면서 너는 참선을 하려는 거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를 흉내내려는 거냐. 만일 참선을 하려는 거라면 선이란 앉고 눕는 따위에 달린 게 아니요, 앉은 부처가 되려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게 아니다.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되고 무시해서도 안된다.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앉은 형태에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를 볼 수가 없다.ꡓ
ꡒ마땅히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무상삼매(無相三昧)의 경지에 들어가겠습니까?ꡓ
ꡒ마음의 지혜를 가꾸는 것은 마치 씨를 뿌림과 같고, 내가 너에게 법의 이치를 설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와 같다. 다행히 너는 나의 가르침을 받기에 적당한 인연을 갖추었으니 곧 ꡐ도ꡑ를 보게 되리라.ꡓ
ꡒ도는 형체와 색깔을 초월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본단 말입니까?ꡓ
ꡒ네가 갖고 있는 마음과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상삼매에 드는 일이다.ꡓ……(이하 略)

나의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으며 기독교인이 되었다. 지금은 이런저런 핑계로 교회를 가지 않고 있지만 절에 가면 마음이 평안해 점을 느낀다. 우리 나라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내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고, 스쳐지나가는 사찰의 곳곳을, 자연들을 나만의 눈으로 심도있게 제작하고 싶다.
마음이 통하는 스님과의 만남도 내게는 큰 복이었으며, 절집의 온화함, 산자락의 그늘까지도 내게는 잔잔한 기쁨이었다.
199I년 새해에도 산과 절을 많이 다니고, 좋은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기를 빌어본다. 사진 일을 하게된 나에게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