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에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열아홉 새색시 는 홀어머니에 6남2녀의 맏이에게 시집을 왔다. 꽃가마를 타고 온 것도 아니고 산 넘어 가북이란 동네에서 송골재를 걸어 함박눈을 맞으며 시집을 왔다. 가난이 철철 넘치는 산골마을로 시집온 새색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철부지 여덟살 꼬마 시동생이었던 나는 마냥 즐거워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친구들에게 자랑했지만 새색시의 고된 시집살이 시작은 눈 내리는 날 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나는 갓 시집온 형수가 부엌에서 일하면 물동이를 들고 냇가에 가서 물도 길어다 주고 밥하는 아궁이에 불도 지펴주었다. 그리고 조카가 생기면서 조카를 돌보는 것도 내 몫이었다. 형수가 품앗이 일을 나가면 나는 조카를 업고 형수가 일하는 곳에 가서 젓도 먹이고 귀저기도 갈아주며 그렇게 세 조카를 돌봤다.
산골의 겨울밤은 아주 길다.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할 일이 있다. 속옷을 벗어서 이를 잡는 것이었다. 엄지손톱을 맞세워 톡톡 눌러 잡으면 손톱이 붉게 물들곤 했다.
또 친구들과 게임을 해서 진 팀은 무우 서리를 하였다. 남의 집 무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와 깎아 먹는 재미는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렇게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은 달빛이 환한 대낮처럼 비춰주었다.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은하의 바다에서 눈이 시리도록 반짝였다. 별이 쏟아진다는 표현이 있지만 달빛이 없어도 별빛이 길을 환히 비출 만큼 아름다웠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고향은 나에게 어머니의 품이다.
지금은 개발의 힘에 밀려 옛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내게 가장 많은 추억이 오롯이 남아있는 고향 김천 수도리.
그곳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공덕으로 무탈하게 잘 살고 있다.
어머니 또한 열여덟 어린나이에 시집을 와서 아주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고 당신께서는 한 번도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사촌누나가 말해 주어서 알았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도 어린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키셧던거 같다.
특히 설거지한 구정물에 음식물이 들어 있는 것을 본 날은 심하게 나무라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처음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던 날은 잊어지지가 않는다. 이른 아침 어머니는 뒤주 속에 감춰 두었던 귀하디 귀한 흰쌀을 한되박 꺼내셨다. 그리고는 흰 광목천 을 마루에 깔고서 그 위에 쌀을 부었다. 토실 토실 살찐 온전한 쌀과 비루먹고 반 토막인 싸래기와 돌을 골라 내셨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 쌀을 보자기에 싸서 외출준비를 하신 어머니는 나도 같이 가자고 하셨다. 눈이 하얗게 쌓인 산길을 뽀드득뽀드득 걸어서 도착한곳은 수도암 이었다.
지금은 선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예전에는 요사채가 있던 자리이다.
요사채에서 잠시 몸을 녹인 어머니는 나를 두고 법당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혼자 아랫목에 앉아 있으니 문이 열리고 스님께서 들여다 보시더니 혼자 있는 나에게 법당으로 가자고 하셨다.
스님을 따라 법당에 들어서니 부처님을 중앙으로 반원을 그린 것처럼 사람들이 둘러서서 절을 하고 있었다. 나도 절을 하였는데 절하는 분들의 모습들이 제 각각이어서 이렇게도 따라 해보고 저렇게도 따라 해보면서 한참을 절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든 철부지는 처음으로 부처님께 예경을 올렸다.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낸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시면서 부처님께 많은 의지를 하신 것 같다. 그때쯤 둘째 아들은 월남 싸움터에 가 있었으니 어머니는 더 간절히 부처님께 아들의 무사귀환을 부탁하셨을 것이다.
어머니가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의지하고 기대었던 정신적 귀의처 수도암에는 조금은 못생긴 부처님께서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가야산 연화봉을 마주하고 계신다.
요즘도 수도암에 가면 어릴적 어머니를 따라 또 소풍을 갔을 때 보았던 전각이나 풍경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지금 선원이 있는 자리에 요사채가 있었고 현재 요사채 앞마당과 주차장 사이쯤에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는 배도 있었다. 현재 선원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스님들 정진하시는 토굴이 있었고 더 왼쪽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그 약수터는 소풍가는 단골 장소였다. 그 곳에서 보물찾기도 하고 씨름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였다. 그리고 연못에 있는 배를 타기도 하였다.
대적광전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지금은 밑둥만 남은 잣나무가 있었고 그 사이로 가야산 정상이 연꽃처럼 솟아 있었다.
나이가 들어 삼보에 귀의하고 공부를 하면서 알아본 수도암은 예사 암자가 아니었다.
효봉, 구산, 전강 큰 스님 등 많은 선지식들께서 수행 정진하셨던 말 그대로 수도암이었다.
6·25 전쟁 이후 퇴락한 수도암 을 새로이 중건하신분이 이 나라 불교계의 큰 스승이신 법전종정예하이시다.
어느 해 설날이 지나 이튿날부터 친구들과 함께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렸다.
수도암에도 세배를 하러 우르르 올라갔다. 스님을 찾아서 세배를 드리려고 하니 스님께서는 법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아홉 번 절을 하라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왜 아홉 번 절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하신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스님께 아홉 번의 절을 하고 맛있는 과자와 과일을 먹었다.
나를 처음 법당으로 이끌어 주시고 또 우리에게 아홉 번의 세배를 받으셨던 스님께서 지금은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방장스님이시며 종단의 큰 스승 법전종정예하이시다.
어머니는 자식을 많아 키우기도 힘드셨을 텐데 그때 나 하나쯤은 절로 보내셔도 되었을 법한데 왜 안 보내셨을까. 그때 출가 했으면 지금쯤 나도 여법한 불제자가 되어 한 소식을 하였을지 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로 출가 인이 되는 복을 짓는다는 것도 결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어릴 적 그 인연과 어머니의 모태 불심이 겹쳐 지금의 내가 있는것이 아닐까. 아직까지도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살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늦게나마 부처님의 법을 접하고 발심하여 재가자로 살아가는 복이 있음을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