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께서 느꼈던 비장한 분단감
우리가 반쪽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저 회장님께서 느꼈던 분단의식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회장님께서 던진 문제, ꡐ서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ꡑ에 대하여 해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북의 작품을 주체(主體)와 전체(全體)라는, 남의 작품을 상업주의와 인간 개인의 구원이라는 두 마디로 요약해냈다. 앞에서 지나쳐 온 약간의 비약을 통해 상업주의라는 애매한 말을 ꡒ상업주의에 묻어 상륙한 해체ꡓ, 개인의 구원을 ꡐ개채(個體)ꡑ라는 말로 치환해보면 저 절실한 분단감을 주체(主體)와 해체(解體), 전체(全體)와 개채(個體)라는 환상적인 대구(對句)로 추상해낼 수 있다. 물론 이런 추상을 통해 양측의 문화이론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두 분단된 영화이론의 내용이 아니라,
양측이 지향하는 사고방식, 논리적인 틀일 뿐이며, 그 상징적인 차이를 드러내어 저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지혜를 넘겨잡아 보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통일을 향한 타당한 사고방식이 전제되어야 하며, 이에 대해 회장님의 지적은 매우 적절하고 보편적인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체(主體)와 해체(解體)
이제 저 어원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두 말이 지향하는 사고방식을 좀더 가깝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로 돌아와 보자(이 두 말은 모두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비롯했다. 그리고 그러한 말들을 규정하는 논리적 틀은 불교전통교학의 體用論에서 가장 세련된 형태로 확립되었다. 그런 말을 깃발로 내걸었을 때는 어쨌거나 그 말에서 유사한 사고방식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단박에 불교이야기로 끌어들이는 것도 전혀 황당무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말의 틀이 갖고 있는 근원적 의도를 밝혀봄으로써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그 방향성을 추정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교란 ꡐ부처님의 가르침ꡑ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소위 불(佛)은 체(體), 교(敎)는 용(用 :佛體敎用)이라는 것이 있다.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다양한 가르침은 각기 그것이 수행되는 특정한 상황과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런데 그 가르침이 불교일 수(불교라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르침의 보편성을 확보해 주는) 있는 것은 그 가르침이 불(佛)이라는 체(體)를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알 수 있듯 體란 말은 존재와 실천을 규정해 주는 최종적인 단거․기초․바탕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만
놓고 보아도 주체는 體를 향해, 해체는 체의 반대 방향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전통적인 체용의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상반된 방향을 갖고 있다. 체(體)에 대한 지향은 용(用)의 문제를 등지는 것이고(역사성을 제거하고 자기동일성을 확보해가는 내적 운동), 용(用)에 대한 지향(指向 ;迵向)은 체(體)를 둥지는 것이다(역사의 변화를 따르는 외적운동). 따라서 불체(佛體)가 보장된 시대에서의 가르침은 세속화 경향을 띠게 되고, 가르침이 세속화되어 불체(佛體)를 위협받게 되는 경우, 출세적(出世的)인 경향이 강해지게 된다(예를 들어오늘날 불교를 사회적인 대중운동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가르침의 用을 강조하는 것이 되며, 수행정진과 깨달음의 체험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佛의 體를 강조하는 것이 된다. 이 두 가지 정반대의 방향은 강하게 대립되어 있으며 그 긴장관계를 해결할 묘안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런 긴장들을 극복해 왔던
전통과학의 방법론들조차 재해석되지 않은 채 망각되어 있는 형편이다).
주체와 해체라는 말도 이처럼 정반대의 방향을 갖게 된다.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려는(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경향이 있는 반면, 해체는 그러한 자기동일성을 폐기하려는(무엇을, 또 왜 해체하든) 경향을 갖는다. 하나가 기초를 단단히 다지려는 구심적 노력이라면, 하나는 기초를 부숴버리려는 원심적 노력이다(體用論과의 형식적 유사성은 가령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 미국식新實用主義와 관련이 있다든지, 등소평의 실용노선이 기존 毛思想의 해체를 초래한다는 사실 등과 유비된다. 내용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體에 대한 부정은 用에 대한 강조와 연관이 있다. 또한 혼란기에 나타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투의 기독교식 복음주의나, 불교의 초세간적 修定主義는 현실의 用을 부정함으로써 세계를 하나의 體로 환원하려는 반대의 경향을 보여준다).
지성사(知性史)는 존재와 당위의 확실한 기초를 확보하려는 치열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또한 그러한 투쟁은 거꾸로 그릇된 기초를 파괴해버리려는 시도들과 겹쳐 있다. 새로운 운동은 이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을 기초주의와 반기초주의라는 말로 요약했다. 아무튼 주체와 해체는 체(體)라는 말을 매개로 팽팽히 맞서 있는 반대방향을 상정한다(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려는 기존의 방법들은 그 자체가 이미 양편의 체제내부에 용해되어 버렸다. 따라서 기존의 방법들은 더 이상 양자를 상위로 통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일을 위하여 무리가 준비한 것은 무엇이냐
이 자리에서 주체나 해체의 깃발을 내거는 사람들의 깊은 생각을 일일이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문제는 해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주체가 해체되기를 바랄 것이고, 반대로 주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해체를 주체화로 재결집되기를 바랄 것이라는 점이다. 자기의 방향만을 주장하는 것은 상대방의 파멸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해체의 입장에서 보면 주체뿐만 아니라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해체의 대상이 된다. 하나라는 것이 이미 해체되었는데 무엇을 다시 통일하겠는가. 반대로 주체의 입장에서는 통일이란 주체의 길을 정해진 대로 계속 가는 것에 불과하다. 주체가 정해졌기 때문에 다른 입장을 인정할 수도, 이견과의 조정도 있을 수 없다. 통일은 일방적인 제압이나 설복과는 다르다).
통일을 위해서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통일을 요청하면서 각자의 방법, 각자의 생각대로 제각기 간다면 통일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단지 자기방식의 확장일 뿐이지 서로 다른 것의 통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들만의 세계, 자신들만의 방법과 방향에만 알게 모르게 매몰되어 서로를 더 높게 조망할 최소한의 기회조차, 상대를 향해 돌아설 한치의 여유조차 없이 살아왔다. 차라리 통일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과연 반쪽이다. 그것도 양극단에서 비극적으로 맞서고 있는 만나기 힘든 반쪽들이다.
저 회장님의 절실한 분단감은 양편에서 최우수상을 선정 ꡐ통일평화탑ꡑ을 주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를 짓게 된 모양이다. 우리는 이제 남산 꼭대기에 주체의 탑을 세우자. 저 모란봉 정상에 해체의 탑을 세우자. 서로를 향해 진정으로 돌아서지 않으면서 어떻게 통일대탑에의 꿈을 키울 수 있겠는가.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은 통일의 신사고(新思考)를 위하여 분단을 절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주체니 해체니 하는 이런 극단적인 사설 또한 결코 마무리될 수 없는 절실한 분단감의 반추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