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드밥세’ 가족과 처음 만남 것은 거의 6년전인 2004년 봄,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 위치한 ‘헤브론’이라는 곳에서 였다. 헤브론은 불교 신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지만 유대와 아랍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의 살았었고, 그와 첫 부인 ‘사라’의 무덤이 있어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인들에게는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어쨋든 내가 헤브론까지 가게 된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약 두달간 머무르며 여러 포토 스토리를 취재하던 중, 헤브론에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며 사는 가정이 많으며, 그 중 분쟁으로 여파로 남편을 잃은 과부 두명이 살고 있는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드밥세 가정을 취재하게 됐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특히 극심한 가부장제 체제에서 가부장이 사망했을 경우 여성들의 삶이 어떠한 지 궁금했다. 드밥세 가정의 두 부인 ‘아이셰’와 ‘하나’는 나의 사진 취재를 적극 허락해 주었고, 나는 그 집에서 하룻밤 머물며 두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아이들의 삶을 사진으로 표현했었다.
그 가정의 사연이란 이렇다. 가장인 ‘이싸 드밥세’는 1998년 인근 유대인 정착촌인 ‘마온’에서 땅문제로 논쟁을 벌이다 정착민인 ‘도브 디르반’을 죽였다. 수배를 당하던 그는 2001년 이스라엘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이싸를 총살 했으며, 동생인 아흐마드는 감옥에 가게 된다. 둘째아들 알리는 아버지 옆에 서 있다가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어 다리 전체를 절단했다. 이싸의 사망후 두 부인 – 아이셰와 하나 – 는 총 14명의 자녀를 함께 키우기 시작했고, 내가 갔을 때 막내 ‘와파’는 아버지 이싸의 사망 후 태어났으므로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들 가족은 분쟁의 여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싱글맘들이 된 경우이다.
그리고 어언 6년이 흘렀다.
6년 후 마침 이스라엘에 다시 갈 기회가 생겨 헤브론에 있는 드밥세 가정을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사진도 전해줄 겸 안부를 알기 위해서다. 그 가족의 정확한 주소는 몰랐지만 일단 헤브론의 ‘야타’ 지역이라는 것은 알았다. 나와 통역은 야타 중심가로 와 물어물어 드밥세 가족의 집을 찾으러 다녔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야타 지역이 다 생소해 보였다. 물론 사진으로 집의 겉모습은 알고 있지만 모든 집이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러던 중 어느 길을 지나다가 몇몇 가옥이 보였다. 나는 혼잣말로 “저 집같아 보이는 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집이 알고보니 정말 드밥세 가족의 집이었던 것이다!
집 앞으로 가니 알리와 3-4명의 여자들, 그리고 어린 아이 10명 정도가 마당에 서 있었다. 알리는 나를 어렵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엄마인 첫째부인 ‘아이셰’를 불렀다. 그녀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정통 의상에 흰 스카프를 둘른 채 내게 걸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아~!”하고 탄성을 질렀고, 이내 “살라마리쿰! (안녕하세요)” 이라고 인사하며 나를 부등켜 안았다. 나는 “하나는 어디있어요?”라고 물었고, 이윽고 아이들 사이로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도 탄성을 지르며 나를 껴안으며 반겼다.
나는 그들에게 6년전 촬영한 사진과 한국에서 모은 성금 중 일부를 기부하러 왔지만 모슬렘 가정에서 5분안에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슬람 교도들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기 때문에 그들은 손님이 오면 꼭 차를 대접하고, 자신들의 먹을 것 중 일부를 준다. 아무리 피난민 가정이라도 초코렛과 사탕은 꼭 주는 법이며, 서로 안부 인사를 한참 주고받아야 예의다.
학교간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든 아이들과 여자, 아들들이 모이자 20여명이 마루에 모여들게 됐다. 나는 아이셰와 하나에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인사를 전했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라며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대답은 마치 합창을 하는 것 같았다. 6년 전 툭하면 울기 일쑤였던 ‘와파’는 지금 9살 초등학생이 됐다.
알리의 부인은 그당시 갓난 아이를 들고 있었는 데, 지금은 세 아이로 늘어났다. 내가 가족들에게 손주들을 합해 모두 가족이 몇명이냐고 물어보니, 그들은 한참을 계산한 뒤 51명이라고 말해주었다. 51명! 이싸 드밥세 한명이 한 군단을 만든 것이다! 하긴 아브라함 한명이 오늘날 수천만명의 유대인과 아랍인의 시조라니 말 다했다.
드밥세 가족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재산도 불려나갔다. 두 부인과 아이들이 살던 집은 2층으로 늘어났으며, 빵을 굽던 짓다만 건물은 이제 셋째 아들 아흐마드와 그 당시 하나와 빵을 굽던 ‘레나’의 보금자리로 화려하게 변모했다. 알리에게도 집이 한채 더 생겨 4채의 집이 다밥세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지역은 다행이 이스라엘의 건축 허가 없이도 가옥을 신축 및 증축할 수 있는 지역이다. 드밥세 가족이 철거민이 되지 않은 것만해도 너무나 다행이다.
아이셰와 하나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남은 아이들을 모아 단체 가족 사진을 찍으니 벌써 1시간이 훌쩍 넘게 됐다.
“오늘은 시간이 촉박하지만 다음에 또 올게요.”
하나와 아이셰, 그리고 다른 여자들은 나에게 손짓으로 “다음에 오면 꼭 우리집에서 자고 가세요.”라고 화답했다.
6년전 하나는 하룻밤을 머물고 간 나에게 작별의 인사로 “아이 러브 유”라며 나를 껴안은 적이 있었다. 6년 후 나도 그 두 부인들에게 “아이 러브 유”라고 말했고, 그들도 그렇게 나와 또한번 다음 만난 날을 기약했다. “인샤 알라 (알라신의 뜻)”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