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눈이 푹푹 쌓이던 날, 철새 보러 나선 길이었다. 서산으로 들어서니, 스친 듯 만난 자리에서 경치 좋은 부석사에 한번 놀러오라며 웃으시던 주경 스님이 떠올랐다. 철새보다 스님 먼저 뵙자는 마음으로 부석사로 향했다. 눈 쌓인 산길에서 걸음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다시 스님을 뵈러 간 지난 토요일에도 큰 눈발이 날렸다. 꼭 삼년 전 그날인 것만 같았다. 그날처럼 스님은 처마에 매달은 메주를 한번 매만지고는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실 런지. 창을 활짝 열고는 저기 좀 보라고, 우리 절에선 바다가 다 내려다보인다고, 해 지는 바다를 좀 보라고 하실 런지. 매일 보는 바다를 그날처럼 그렇게 어여삐 바라보실 런지. 눈발을 헤치며 한달음에 눈길을 달려 스님을 뵈러 갔다.
서산 부석사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흐르는 절집이다. 겉치레가 화려하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것 하나 없이, 구름 흘러가는 듯한 나뭇결이 집안에 흘러 다닌다. 따끈한 차를 내주시며 스님은 말씀하신다.
“450년 된 집이에요. 경허 만공 스님이 사시기도 하셨지요.”
11년 전 스님이 부석사 주지로 왔을 땐, 천정과 벽이 합판과 도배지로 다 덮여져 있어 천정과 벽의 오래된 나무가 하나도 보이질 않았단다. 스님은 도배지를 다 뜯어내고 한옥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단다. 얼마 전에 누각을 정비했는데 그것도 다 부수어낸 것이 아니라 복원했단다.
“수덕사 박물관 개관하는 일을 2년간 맡아서 했어요. 대학원에선 불교문화재보존학과를 전공했고요. 절 주지로 살면서 그런 경험들이 불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네요.”
주경스님은 템플스테이를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국가적으로 다양한 준비를 할 때 불교계에서 냈던 아이디어가 바로 템플스테이였는데, 그때 조계종 포교원 포교국장이었던 주경스님이 템플스테이를 준비하고 조직하고 운영했다. 각 사찰의 신청을 받아서 전국 35개 사찰에서 시작한 것이 템플스테이의 첫 걸음이었다. 월드컵 이후, 2004에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조직되면서부터는 주경스님이 문화사업단의 사무국장으로 임명 되어 템플스테이사업을 총괄했다. 그때 스님은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가장 큰 자부심을 느끼는 건 불교에 대한 인식과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불교 자체가 구복불교, 노인들이 자신의 복만 구하는 그런 형태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불교를 모르던 젊은이들이나 외국인들, 타종교인들이 한국불교를 새롭게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았나 싶어요.”
예전에 밖에서 바라보던 불교는 은둔의 모습이었다면, 이젠 사회와 소통을 하려는 물꼬를 트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아직까진 많은 부분이 부족하더라도 말이다. 일반인들 사이에 템플스테이가 유명해졌다지만 8년 동안 겨우 대한민국 1%만 체험했을 뿐이란다. 스님은 말씀하신다, 이제 10%, 20% 더 늘어나야한다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그래야 불교나 한국 사회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요즘 신세대들은 한국 전통이나 문화에 대해 전혀 모르죠. 템플스테이를 통해서 우리 전통문화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봅니다. 지금은 어딜 가 봐도 한옥이 다 사라져버리고 없어요. 찾아갈 외가나 고향집도 없지요. 할머니가 광주리에서 감이나 고구마를 꺼내주는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런 한국 전통문화가 남아 있는 곳은 사찰밖에 없어요. 자연이라는 환경 속에서 한옥이라는 건물에서 스님들이 한복을 입고 사는, 우리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는 데가 사찰뿐이지요. 그런 부분에서 사찰은 한국인의 유일한 마음의 고향으로 남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인지 부석사를 둘러보다보면 곳곳에 벤치도 쉴 곳도 많이 만들어놓았다. 누구든 마음 편히 쉬었다 갈 수 있는 도량이 바로 주경스님이 추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석사 신조가 그렇습니다. 밥 때 되면 밥을 주고 날 저물면 방을 줘서 자고가게 하고 그것도 아니면 차 한잔이라도 나누고 가게 하자.”
스님은 세 아이를 키우면 산다. 9년째 함께 살고 있는 열세 살 막내, 8년째 살고 있는 열다섯 살 첫째, 올해부터 같이 살게 된 열네 살 둘째. 절에 찾아든 인연으로 가족이 되었는데, 스님은 자신이 키운 게 아니란다. 그저 한 식구로 함께 사는 것이란다.
어려서부터 5형제 속에서 살아온 스님은 여럿이 대중이 같이 산다는 개념으로 늘 살아간단다. 그래서 11년 전 부석사에 왔을 땐 주지스님과 노 보살님 둘만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15명의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단다.
“숟가락 하나씩만 더 놓으면 되지 않겠어요. 제가 밥 두 그릇 먹는 거 아니잖아요.”
스님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불교학생회를 고등학교 3년간 한 번도 안 빠지고 나갔다. 그때는 신심이라기보다 청소년기의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도 있고, 좋은 친구도 사귈 수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다가 고3 무렵엔, 법사 스님들이 멋있게 보여서 출가 생각을 많이 했다. 고3 여름엔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도 했다. 고등하교 때 불교를 접하면서부터는 삶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살아갈 것인가가 가장 큰 화두였다. 부모님이 혼자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해도, 혼자 살아갈 의지와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다보니 집 나갈 궁리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공부를 같이 했다. 대불련 활동에 혼이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학 시절을 보냈다. 불교적으로 한층 성숙해진 시간들이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짐 정리하고 3월초에 수덕사로 출가했다.
“절에 들어올 때만 해도, 내 주변 사람들도 나도 내가 평생 절에서 살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 내가 워낙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길면 한 5년 살다 올 거라고 생각들을 했지. 그런데 그럭저럭 절에 온 지도 25년 다 되어가네요.”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어려서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었으면 한다. 모든 이들이 불교를 믿기를 바라거나 출가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스님이 불교를 통해서 느꼈던 감사함과 넉넉한 기회를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늘 절 문을 열어두고 살지요.”
스님은 현재 ‘역삼 청소년 수련관’의 관장으로 있기도 하다. 조계종 파라미타에서 위탁 받아서 운영하는 수련관이다. 스님은 조계종 포교국 포교국장으로 있으면서 파라미타 청소년 협회의 사무총장을 맡았었다. 그때, 고등 대학 시절에 불교의 은혜가 크고 고마워서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청소년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부석사에서도 청소년들을 지도해왔다. 그러다보니 현재의 일을 맡고 있다.
템플스테이 온 사람들로 마당이 시끌벅적해지자 문을 열고 나가 스님은 손님들을 맞으신다. 그러더니 스님은 눈 쌓인 절 마당을 성큼성큼 걸어 산신각으로 걸음을 옮기신다. 그 길에 문득 걸음 멈춰 뒤돌아 절을 둘러보시더니 말씀하신다.
“99년도에 부석사에 올 때만 해도 서산 사람들조차도 모르는 절이었고, 나도 수덕사 말사에 부석사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때만 해도 삼십대 중반의 경험 없는 젊은 스님이었는데, 여기서 지내면서 제 스스로도 많은 성장을 한 것 같아요. 이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포교원 포교국장도 했고 문화사업단 사무국장도 했고 총무원 충무국장도 했고 종회의원으로 활동 하고 있고…. 10년 넘은 세월을 부석사와 함께 성장하고 수행하고 같이 발전해 온 것이 아닌가 싶네요.”
이런저런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또 썰물처럼 쓸려가 가슴이 헛헛해지는 세밑, 감회가 새로운 듯한 스님 곁에 서서 해지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는 올 한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해보았다.
스님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말씀하셨다. 그 첫 번째가 수덕사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란다. 3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육체적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살면서 어떤 어려운 일도 이겨내게 한 단련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어차피 해지면 끝나는 일이니까. 시작한 일은 끝이 있지만 시작하지 않은 일은 끝이 없지요. 그리고 힘든 기억은 다 사라지고 자신감은 더 커졌어요.”
그때 스님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는 너무 좋아서 친구들 손 붙잡고 출가하러 가자고 할 정도였단다. 그래서 스님은 불자들한테도 한발 더 절 안으로 들어오라고, 그렇게 스님들의 삶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들어와 보라고 한단다. 그렇게 출가의 삶을 공유해 보길 원한다. 그러니 두번째로 꼽는 좋았던 시절은 해인사에서 강원 생활 하면서 100명 넘는 대중과 생활 할 때란다.
그리고 세 번째는 94년도에 태국에서 네 달 동안 탁발을 할 때란다. 유리조각을 밟아 발이 찢기기도 하고 개한테 쫓기기도 하고 길을 잃은 적도 있지만 그렇게 얻어서 먹는 밥이 스님은 고마웠단다. 시주물을 먹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뚜렷했단다.
“목발을 짚고 나와 몸의 고통을 줄여달라고 하는 사람들, 생일에 자신의 도시락을 주고 가는 아이,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죠. 그러니 빚이 안 생겨요. 늘 축원해 주고 기도해 주니까.”
스님으로 산 것에 가장 만족한다는 주경스님의 원력은 무엇인가 여쭙는다.
“밥값하고 사는 거죠. 내가 불교를 통해 얻은 기쁨과 즐거움을 무한이 베풀고 나누고 싶어요. 원래 내 것이 아니라 나도 받은 것이니 돌려줘야지요. 부처님의 도량에 오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자연스럽게 좋은 인연들을 맺어주는 게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스님은 인도불교를 회복시키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탄생지이지만 불교가 없어진 나라 인도. 그곳에 불교를 재탄생시키고 육성해서 인도가 불교국 본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게 가장 큰 꿈이란다.
어두컴컴해진 산중의 눈 내리는 밤, 스님은 템플스테이에 온 이들과 저녁공양을 하자며 눈길을 사붓사붓 걸어가신다. 사람들과 함께 걷는 밤길에 간간히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은 분명 주경스님의 격의 없는 농담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늘과 바다를 분간할 수 없어진 컴컴한 밤, 나는 절 마당에 서서 스님이 쓰신 책 <미안하지만 다음 생에 계속됩니다>를 다시 한번 펼쳐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올 한해도 주경스님처럼 늘 웃으면서 살자고, 그럼 되지 뭐가 더 필요하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