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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향례五分香禮도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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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김사인/시인 동덕여대교수 2010년 01월 335호
모처럼 예불에 참례합니다. 법고와 목어와 운판에 이어 깊고 정성스런 스님의 음성공양이 시작됩니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나도 눈을 감고 속으로 같이 뇌입니다. 불전에 향을 올리고, 이 향은 몸과 마음의 삶이 여법하기를 간구하는 지계와 인욕의 향입니다, 이 향은 본래 성품의 적연부동 속에 거하기를 구하는 선정과 정진의 향입니다, 이 향은 모든 무지와 미망, 어리석음의 자식인 헛욕심과 성냄을 불사르는 반야와 보시의 향입니다...하고 마음을 오체투지합니다. 해탈향과 해탈지견향은 너무 아득하고 눈부신 이름이어서 내 쉰 목소리로는 차마 발음하기가 무참합니다.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눈물이 핑 돕니다.
실은 향만 향인 것이 아니라 온 몸을, 온 생을 향으로 세워 사루어 올릴 때 비로소 헌향 공양이 온전해지겠지요. 곳곳이 다 불전이고 일마다 다 불공이 되는, 세계가 큰 한 불당이고 우리의 생애가 한 큰 예불이 되는 것이겠지요.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 5분법신의 공덕을 기려 그 성품의 향기로움을 찬탄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뿐 아니라 우리들 저마다가 부처를 이루어야 할 존재인 까닭에, 부족하고 또 부족하더라도 제 몫의 향을 올리는 떨림과 긴장이 있어야 더 예불다운 것이라고 나는 멋대로 생각합니다.
‘광명운대光明雲臺 주변법계周遍法界 공양시방供養十方 무량불법승無量佛法僧’ 그러므로 이 향기가 구름 위의 빛과 환함처럼 법계에 두루 퍼져, 시방 삼세의 한량없는 부처님과 진리와 구도자들께 공양하여 지이다. ‘광명운대 주변법계’를 천천히 소리 내면 내 몸은 수백억 광년 크기의 우주 복판으로 떠오르고, 마치 은하와 성운들의 장엄함이며 시공간들의 나툼과 사멸이 내 속에서 치러지는 느낌입니다. 이어서, 그렇고 말고요, 무변 법계의 모든 곳 모든 때(시방 삼세)에 저 부처님들, 섭리들, 도인들은 셀 수 없이 가득한 것일 터. 티끌도 풀잎도, 빗방울도 바람도, 벌레도 나도 그 중 하나겠지요. 내가 올리는 향이 적으나마 그 모든 존재들께 미쳐가 지이다, 이렇게 간구해보는 것입니다. 겸허하게 그러나 혼신의 힘으로.
‘헌향진언獻香眞言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옴 바아라 도비야 훔’. 향 올리는 일의 크고 높음을 기리고 찬탄하는 진언입니다. 동시에 헌향공양의 엄중함을 상기하게 하는 진언이기도 하겠습니다. 향을 불에 사르고 그때의 향기와 연기에 겉으로는 의탁하고 있지만, 헌향의식의 본의가 시방 삼세의 뭇존재들 앞에 자신의 수행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데 있을진대, 어찌 두렵지 않을 일이겠습니까. 어찌 진땀 흐르지 않겠습니까.
불에 태운다는 일도 깊은 뜻이 있을 법합니다. 다비(불에 태움)를 통하면 모든 존재에게서 비본질적인 차원들, 본래 면목을 가리고 있던 꺼풀들, 미망들을 벗겨낼 수 있습니다. 본질이랄 것들만 추려집니다. 태움은 거짓과 꾸밈을 벗겨내는 유력한 연금술적 과정입니다. 그러니 헌향의 촛점이 향기와 연기보다 그 ‘태움’ 쪽에 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는 것도 그 의식이 지닌 다른 측면을 드러나게 할 듯합니다. 요컨대 헌향공양은, 태움을 거쳐 가감 없이 자신의 깜냥을 직시하는 의식인 동시에, 마음과 육신의 현재를 연기와 냄새로 시방 삼세의 제불보살과 자신에게 고하는 의식이라 볼 수는 없을지요. 그리고 그때 우리는 과연 쓸만한 냄새를 내는 향일 수 있을까요.
진언(만트라)은 ‘참으로 된 말, 소리가 된 참’입니다. 소리가 곧 뜻이고 뜻이 곧 소리인, 말의 궁극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옴’은 모든 진언, 모든 소리의 어머니이며, 우주를 지속시키는 기저의 파동이라고 합니다. 가장 높은 찬탄의 말이기도 하고요. ‘바아라’는 바즈라(vajra, 金剛), ‘도비야’의 ‘도비’는 향 태움 또는 향 태우는 이의 높임말이고 ‘야’는 ‘~에게’에 해당하는 여격조사라고 합니다(어떤 분들은 ‘도비야’를 촛불(촉燭)을 뜻하는 todya로 새기기도 합니다마는). ‘훔’은 ‘옴’으로 연 진언을 닫고 마무리는 진언입니다. 이 헌향진언을 천천히 세 번 반복하노라면 나는 이상하게도 용서와 위로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예불을 계속 이어갈 자신감도 얻게 됩니다.
헌향진언에 이어서 일곱 번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다해 귀의하는 예를 올립니다’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그리고 일곱번의 절과 함께 삼보의 명호를 하나하나 새기면 감동을 받은 마음은 소년처럼 벅차오릅니다. 마침내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더불어 나 남 없이 일시에 성불하기를 바랍니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로 칠정례를 마칠 무렵이 되면, 마치 첫 마음을 내던 때처럼 선한 소명감으로 영혼이 달아오르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공부의 거의 대부분이 예불 속에 넘칠 만큼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는 근래로 올수록 사찰들의 예불문 독송 속도가 빨라지는 데 대해서는 섭섭함을 가집니다. 독송이 빨라질수록 의식의 정중함과 깊이가 감하게 되고, 입으로 글만 욀 뿐 짧으나마 예불시간이 온 마음을 실어 예불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지 못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불은 ‘답습’되는 요식이 아니라, 처음이자 마지막이듯 늘 새로이 ‘실천’될 때 보람있는 수행일 터입니다. 하기야 정해진 예불시간에다 대고만 트집을 잡을 일이겠습니까. 공부에 뜻을 둔 이라면 삶의 모든 순간들이 예불로 충만하지 않음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