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쪽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원효나 유교의 역에서 말하는 수리적인 관점과 너무나 흡사하다. 시기적으로도 이에 대한 동양의 지론은 주세페보다 훨씬 앞서 있다.
먼저 역 계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우주를 나타내는 수는 단지 1부터 10까지의 자연수에 지나지 않는다. 곧 만물을 이루는 세상의 이치를 수로 나타내면 十이 되는데 그 수는 다시 만물을 낳는 생수와 만물을 이루는 성수로 구분되고 양(陽)이라 일컬어지는 홀수인 하늘의 수와 음(陰)으로 이해되는 짝수인 땅의 수로 나누면서 그것들의 전체적인 작용이 바로 천지 만물을 펼쳐 보이는 책수가 된다는 관점이다.
그 설명을 직접 주역 계사상전 九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은 하늘의 수, 2는 땅의 수, 3은 하늘의 수, 4는 땅의 수, 내지 9는 하늘의 수, 10은 땅의 수이니 하늘의 수가 다섯이고, 땅의 수가 다섯이다. 다섯의 자리가 서로 얻어 각기 합함이 있으니 --- 대연의 수가 50이요 그 쓰임은 49가 된다고 하였다. (天一, 地二, 天三, 地四, --- 天九, 地十이니 --- 天數五, 地數五, 五位相得而各有合. 大衍之數五十, 其用四十有九)
그런데 그 구절을 음미하다 보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지론이 하나 있다. 왜 만물을 펼쳐 보이는 천지 대연의 수가 50이라고 말하면서 그 쓰임은 49가 된다고 보느냐의 문제다. 이는 만물이 하나를 근본으로 하여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리적으로 설명하면 더욱 간단하다. 2는 1에 1을 더한 수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3은 2에 1을 더한 수다. 물론 그 나머지도 모두가 똑 같은 원리다. 그렇다면 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1은 0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유를 떠받드는 것은 무의 개념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원효 數十錢의 핵심 이치이기도 하다.
원효에 의하면 수의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서로의 독립된 속성을 지닌 연기의 세계다. 이는 개념상 동체문과 이체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그 개념은 다시 동체문 안에서 서로의 수가 서로와 맞물려 있는 相卽門이 되고 서로가 서로를 이루는 근거가 되는 相入門으로 이해한다. 어렵게 느껴지는 개념 가운데 먼저 相入門을 설명하면 1부터 10까지 수로서 성립되는 과정에 서로는 서로를 이루는 근거가 되어진다는 뜻이다.
반면 수의 속성은 다시 1이 없으면 2, 3 혹은 10 등이 성립할 수 없으므로 1은 곧 2가 되기도 하고, 3이나 10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와 맞물려 있다는 相卽門의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1을 근거로 2나 3 혹은 10 등이 성립하므로 1 가운데 2나 3이 있고 나아가 9나 10도 성립이 된다. 그러나 1이 2라고 할 수가 없고, 또 1을 9나 10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은 1 가운데 많은 것이 있고, 1이 곧 많은 것 자체가 된다는 의상조사 법성게의 내용에 통하는 一卽多 多卽一 一中多 多中一의 원리다.
이처럼 수리가 반영하고 있는 세상의 이치는 불교의 핵심을 이해하는데도 매우 유용한 관점이 된다.
따라서 수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초점이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연기의 문제로 옮겨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아함경의 본문 말씀을 한 구절 말미에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연기란 이른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이름과 물질이 있고, 이름과 물질을 인연하여 여섯 감관이 있으며, 여섯 감관을 인연하여 눈 귀 코 등의 여섯 감각기관이 있으며 여섯 감관기관을 인연하여 감촉이 있고 감촉을 인연하여 느낌이 있으며, 느낌을 인연하여 욕망이 있고, 욕망을 인연하여 잡음이 있으며 잡음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늙음· 병· 죽음과 근심 걱정· 고통· 번민이 생긴다. 이리하여 다섯 가지 쌓임의 몸을 이루었느니라.(아함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