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뭇잎 다 떨군 나뭇가지에 식은 볕이 걸린 범어사의 늦은 오후, 스님이 문밖으로 불쑥 얼굴을 내미신다. 강주실로 따라 들어가니 방은 텅 비었다. 작고 소박한 책상 위에 강의를 위한 경전 몇 권뿐. 책꽂이가 없으니 책이 없고 책이 없으니 책꽂이가 없다.
“우린 학자가 되려고 이 산중에 온 사람도 아니고 강주 하러 온 사람도 아니잖아요. 일대사를 해결하러 온 사람이지. 책은 자기를 고요 속으로 밀어 넣어서 고요의 텅빔과 빛을 보라는 데 있는 거예요.”
스님은, 책 쌓아놓고 연구하는 건 불교학자가 할 일이고 불교인은 고요 속에 있는 것이라 하신다.
“새벽에 일어나면서 내 숨결을 항시 안 놓치려고 노력해야 하고 걸어가면서 내 발자국 소리를 안 놓치려고 노력하고 생각을 쫓아가기보다 생각을 돌이켜 본심으로 돌아가야지요.”
그러니 책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수많은 책이 아닌 한 두자의 글귀로도 인생에 변혁이 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스님에게 있어 경을 보는 것은 일종의 참선인 것이다.
금강경에, 사구계를 해설해주면 목숨을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니 사구계는 그저 문구, 글귀가 아니라 진여해탈로 가는 열쇠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책 속의 글귀는 자라지 않아요. 그러나 사람 가슴 속에 심어지면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계속 자라요. 어려서는 글자로만 보였던 구절들이 어떤 인연을 만나 알아지고, 늘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지요. 변화무쌍하게.”
스님이 문득 책상을 한번 들어보란다. 별 것 아니게 보였던 작은 책상이 돌덩이보다 무겁다.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스님은 말씀하신다, 이 경상은 선방의 죽비와도 같은 것이라고. 침상 옆에 그 무거운 경상을 두고,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늘 경을 의지해 사는 스님으로써, 그리고 강주로써의 책무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책상의 크기가 두 팔을 얹으면 딱 맞을 만큼 작은 이유는 스님이 안고 갈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님의 철학이 담긴 경상이다.
“몸이 하자는 대로 세속이 하자는 대로 내 마음을 써버리면 그건 중이 아니잖아요.”
스님은 해인사에서 출가해 통도사에서 강원을 마치고 졸업반 무렵 3년 기도를 마치고 통도사에서 2년간 중강 생활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은해사에서 대학원 3년을 거치고 99년부터 범어사에서 강사로 살았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강주 자리에 앉게 되었다.
스님은 자신이 강사의 길을 걷게 될 줄 몰랐단다. 통도사에 있을 때, 교육원장 스님이 강의를 하라고 해서 아는 것도 없는데 어찌 강의를 하냐 했더니, 교육원장 스님이 말씀하셨다. 누가 알아서 가르치나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지.
“가르치면서 수행의 요철을 잡아갑니다.”
스님이 교육을 하면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화합이다. 교육의 효율성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화합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해도 수행이 뛰어나도 화합하지 못한다면 스님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합은 곧 자비입니다. 화목하지 못 하면 아집뿐이에요. 탐진치에 끄달려 사는 것이지요. 남을 바로잡으려고 하고 다스리려고 하면 안 돼요. 남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돼요. 그게 아집을 꺾는 첫 번째 요소 아니겠어요?”
스님 책상 옆에 오래된 사진 두 장이 있다. 단체 사진인데 무술하는 이들의 사진이다. 거기엔 막 출가를 한 용학스님도 있다. 스님은 십대 때부터 무술을 배웠단다. 무술을 지도하는 스님 밑에 있던 제자들 몇몇이 스님이 되었는데 그 중 한 분이 용학스님이란다. 스님들이 걸망을 지고 오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고 무협지에 나오는 도인들과도 같은 얘기들을 많이 들으며 자연스레 출가로 이어졌단다. 그러나 뜻은 전혀 다른 데에 있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중학교 때부터 키르케고르, 니체,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는데 중2 때 히틀러 책을 읽을 때는 국어선생님의 걱정을 듣기도 했단다. 무술을 하는데다가 말수도 적은 아이가 그런 책을 읽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을 터다.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왠만한 책들에 대해서는 심드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가귀감이라든가 한산시를 읽게 되었다. 그것이 인因을 쌓아온 게 아닌가 한다.
“저는 산에 와서도 영원히 무인이라고 생각해요. 선이 좋아요.”
공부와 무술은 왠지 괴리감이 느껴지는데, 스님은 정신과 육체를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술이라고 말씀하신다.
무술을 가르쳐주신 스님은 용학스님이 책을 너무 많이 본다고 싫어 하셨단다. 책 많이 보면 말 잘하는 것뿐이지, 말 잘하는 것과 도하고는 상관없다고 늘 염려하셨단다. 용학스님은 지금도 그걸 수칙으로 삼고 글을 본다.
스님은 20년 전쯤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가부좌를 틀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탓에 스님은 선방에 앉을 수 없어서 아마도 계속 글을 보지 않았나 싶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런 스님의 말끝은 이렇다.
“나는 경이 참 좋아….”
스님은 범어사로 올라오면서 수양버들을 봤냐고 물으신다. 목적만 두고 걸었던 걸음이라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왔으니 못 본 것이 수양버들만이 아니라며 고개를 숙인다.
“낙엽이 다 졌는데도 수양버들 이파리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왤까요? 부드럽기 때문이지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씀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씀이다. 보통, 무술을 하는 사람을 강하게만 보는데 사실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야 한단다. 그러나 자기 관리에 있어서는 은산철벽 같아야 한단다. 그렇지 못하면 잡되게 된단다. 그래서 스님은 늘 부드러운 수양버들을 바라본단다.
“밍밍한 물맛이 백가지 맛을 다 이길 수 있어요. 본심을 담담히 지켜갈 때 자비는 저절로 나옵니다. 텅빈 마음으로 제 자리에 가만히 서서 오래도록 바라봐야지요.”
스님은 오래 참고 집중하고 잡념을 끊어내야 하는 사마타 수행에 무술이 도움이 많이 되었단다. 무술은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굉장히 예리하고 섬세하기 때문이다. 한시도 놓칠 수 없는 긴장감은 방심하면 끊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니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님은 무술로써 예의범절을 배울 수 있고 건강을 다질 수 있도 있단다. 그러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데 그 자투리 여유를 여유롭게 여겨 사는 게 행복인 것 같단다. 그런 스님의 원력은 무엇인지 여쭙는다. 그러자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말씀하신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일체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겠다는 맹세,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인간의 많은 번뇌를 끊겠다는 맹세,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광대무변한 불타의 가르침을 모두 배워 깨닫겠다는 맹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가장 존귀한 불도를 닦아 깨달음에 이르러 성불하겠다는 맹세.
스님은 사홍서원이야말로 부처님과 모든 선지식들의 서원이며 이 시대에 스님이 받들어가야 하는 서원이기도 하단다.
“개미가 작은 바가지 하나 들고 바닷물을 퍼내고 있으니, 그게 다 퍼지나요. 그렇지만 금생에 안 되면 다음 생에 또 다음 생에 퍼내면 언젠가는 다 퍼지지 않겠어요? 죽고 죽어도 번뇌가 있다면 끊임없이 그렇게 퍼내고, 공부가 있다면 태산같이 모래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가는 거지요. 내 여의주가 드러나는 그날까지 끝없이 퍼낼 거예요.”
그런 스님은 아마도 전생에 스님이었던 것 같단다. 수계 받기 전에 받은 빈 바랑이 하도 좋아 밥 먹을 때도 세수할 때도 메고 다니고, 출가할 때 머리 깎으면서도 웃기 바빴단다. 그러니 개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바닷물을 퍼내고 있었던 셈이다.
“난 초라한 비구지만 부처님의 그림자입니다. 삐뚤어진 입일지라도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해요. 매 순간 진실을 토로하면 어느 날 거짓된 인간이 점점 바로잡아지고 부처의 모습에 가까워지겠지요.”
스님은 문득,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국화를 손으로 비벼봤느냐고 물으신다. 그 넉넉한 향기를 아느냐고 물으신다. 그러더니 통도사 살 때 지은 한시를 한 수 읊어주신다. 가을이면 학인들한테 자주 들려주시는 시란다.
謝菊餘香 사국여향 / 시든 국화 넉넉한 향
秋日寂然玉水池 추일적연옥수지 / 가을볕은 고요히 맑은 연못으로 스미고
金花爛漫傲霜時 금화난만오상시 / 국화는 찬이슬 머금고 난만히 어울렸네
滿山紅葉松風灑 만산홍엽송풍쇄 / 온산 가득한 풍엽은 솔바람이 씻어주니
謝菊餘香舊友知 사국여향구우지 / 시든 국화 넉넉한 향기 옛 벗은 알리라
시든 국화는 빛깔도 잃고 보잘 것 없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손 위에 놓고 비벼보면 진한 향기가 넉넉하단다. 사람이 살다 가고나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였어도 그 사람을 비벼보고 더듬어 봤을 때 향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진짜 마음은 바꿀 수 없잖아요. 진짜 마음은 빌릴 수도 없잖아요.”
숱한 망상과 숱한 생멸 속에 살면서 진여자성眞如自性에 대해서 공부한다면, 무술을 하든 참선을 하든 발길만 제대로 간다면, 나중에 국화처럼 시들지언정 향기는 간직하고 있지 않겠나 하는 말씀이다.
이십대 어느 가을, 스님은 물든 미루나무를 보며 이제 출가를 해야겠다 싶었단다. 그런 가을 나무 아래에서 스님은 먼 산을 보셨다. 그때 나는 슬며시 시든 국화 꽃송이 하나 만져보았다. 그러나 넉넉한 향기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서 차마 비벼보지만은 못했다. 그때 스님이 말씀하셨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다리 뻗고 울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