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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 8등좌 완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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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손지민/연세대학교 4학년 2009년 12월 334호
첫 눈이 내리고 진짜 겨울이 온 것 같습니다. 달력의 큰 숫자만 커질 뿐, 두터운 외투에는 아직 손이 가지 않았는데, 첫 눈과 함께 어느새 낭만적인 하얀 겨울을 꿈꾸게 됩니다.

\"나를 사랑으로 채워줘요, 사랑의 바떼리(?)가 다 됐나 봐요, 당신 없인 못 살아♬\" 한 젊은 여성 가수가 부른 사랑의 배터리라는 노래 가사 일부입니다. 그녀는 님 없이 못 살고, 저는 꿈 없이 살기가 힘든 사람이지요. 저는 올해 겨울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앞뜰보다 200배는 더 황홀한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눈사람, 활기찬 스키장, 성탄절 트리, 빛나는 루미나리에... 겨울을 기다리게 되는 수없이 많은 ‘타당한’ 이유들이 있지만, 저에게 이번 겨울은 기다림이 특히 애절합니다. 00년 초, 제 인생이-미래가- 걸린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번 12월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내실 있게 보내야 하는 한 달입니다.

해인지에 실릴 제 글의 레이아웃을 그려보다가 문득 해인사 절문에서 산사에 이르는 비탈길이 떠올랐습니다. 새로이 등산에 취미를 붙인지 얼마 안돼서인지 이렇듯 모든 것을 걸어 오르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눈 덮인 가야산이라. 눈을 감고 작년 겨울을 떠올려봅니다. 아주 잠시 생각을 품었을 뿐인데도 머릿속에 떠오른 장관에 여운이 남습니다.

올 겨울은 예년보다 추위가 누그러진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초보등산가인 저에게도 겨울산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2시간 정도면 산행을 끝낼 수 있는 산책 겸 코스를 주로 다녔습니다. 첫 등반이라 할 인왕산을 비롯해 남산, 우면산, 안산이 그것입니다. 이제 제가 처음에 꼽았던 목표 중 구룡산, 백련산, 아차산, 대모산이 남았습니다. 이 산들을 모두 정복(?)하고 나면 좀 높다는 도봉산과 관악산, 북한산도 도전할겁니다. 이번 달이, 2009년이 훌쩍 떠나버리기 전에요.

빨갛고 노란 단풍잎으로 둘러싸였을 때는 “아, 이게 ‘산의 맛’이로구나” 라며 우쭐했는데, 겨울산을 타보니 지난 등산은 하하호호 단풍놀음이었구나 싶더이다. 겨울등산의 묘미는 헐벗은 나무들에 있습니다. 수풀이 우거지거나 단풍이 무성한 계절에는 그것만으로 예쁜 풍경을 만들지만, 정상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낙엽이 진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 사이로 시야가 확 트이면서 산 아래에서부터 정상의 암봉들을 보면서 그 힘을 느끼면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인왕산 초입에서 어린 학생이 산을 다 타고 기특하다며 인왕산의 문화재며 등산코스며 주의사항 등을 세심하게 일러주시던 할아버지 두 분이 떠오릅니다. 등산하며 만나는 연령을 초과한 이른바 \'동지\'들과의 대화 또한 상쾌한 산 공기만큼이나 특별합니다. 상하관계, 권위적인 분위기를 싹 걷어낸 교수님과의 만남 같다고나 할까요. 비단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과의 대화가 아니어도 기껏해야 아래위 다섯 살 터울이 고작인 학교에서의 만남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진지한 인생설계 이야기도 무겁지 않게,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도 가볍지 않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산행길 동지 만들기 비법을 전수해볼까 합니다. step 1. 헉헉거리며 오르는 나와는 달리 연배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가뿐한 걸음걸이에 자연스럽게 동경어린 눈빛이 망울집니다. step 2. 눈치 빠른 어르신들은 구름 위를 걷는 듯 한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오시지요. step 3. 자신만의 등산 노하우와 함께 커다란 등산가방 깊숙이 손을 넣어 캔 커피까지 꺼내주십니다. 참 쉽죠잉?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만만하게 보면 안 돼. 산을 오르는 데 있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과욕이지. 처음부터 산 끝까지 오르고 말겠다는 오기로 뭉쳐있으면 무리하다 다칠 수도 있어. 몇 단계의 중간 목표를 세워서 차근차근히 밟아나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착한 네 모습을 볼 수 있을게다.”

안산에서 만났던 아저씨께서 제게 해주신 말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제게 ‘학생 여기 한번 앉아봐요.’라고 말문을 트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산이라는 게 저같이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에게는 참 도움이 됩니다. 취업 시장의 문은 넓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청년실업률은 경제계 화두가 된 지 몇 년째인 요즘, 조바심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제일 큰 적이기 때문입니다. 단계적인 목표를 세워 도전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바라던 바로 그 자리에 올라서 있을 텐데, 당장 눈앞에 내가 그리던 성공이 보이지 않는다며 조바심을 내다가 지쳐 포기하는 친구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방송 진행을 준비하는 저는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방송은 시청자를 위해 제작되고, 프로그램 안에서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냄새 나는 따뜻한 방송을 진행하고 싶은 것이 제 꿈입니다. 등산은 다양한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처음 등산을 결심하게 된 건, 폐활량을 키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체력관리와 함께 폐활량도 늘려보자는 굳은 의지로 시작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산을 오르다보니, 몸은 물론 산의 정기를 받아 정신력도 강해지고, 뱃심과 함께 전지현도 울고 갈 탄탄한 복근도 생겼습니다. 이러다 몸짱아나운서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호호호.

열심히 산을 오르고 또 오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봅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뚜렷이 보이는 절벽 위 꼭대기바위가 보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곧 도착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한번 씩 큰 미소를 짓고는 다시 전진입니다. 인생의 오르막길만만 남아있는 20대 청춘이기에 저 높은 정상도 멀어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 또한 청춘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며 앞꿈치에 바싹 힘을 줘 힘차게 뒤꿈치를 내리 눌러봅니다. 한 걸음 한걸음이 가벼운 것이 느낌이 좋습니다. 올 한 해가 잘 마무리 되어 좋은 결실로 내년을 맞이할 것만 같은 강력한 예감 아니, 확신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