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이맘때면 부랴부랴 미국에 있는 수첩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 다음해 수첩을 간신히 주문한다. 왜 하필 미국에 있는 수첩회사냐 하면 그 회사 수첩은 매주 계획과 전화번호부가 함께 있을 뿐 아니라 크기도 손바닥만 하고 두께도 얇아 수납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블랙베리나 iPod, iPhone 등 전자수첩을 가지고 다니는 젊은이들도 많은 데, 나는 구식이라 아직도 손으로 직접 쓰는 수첩을 가지고 다녀야 편하다.
이 수첩을 첫장부터 현재 11월 중순까지 넘기노라면 ‘세월이 정말 빠르다’ 그리고 ‘인생 무상이구나’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난 한해동안 얼마나 보람된 삶을 살았는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낭비했을까?’
나는 사진기자다. 그것도 보도사진기자. 그러나 나는 단발적인 사건사고를 취재한다기 보다는 인권문제에 대한 주제를 잡아 심층 기획취재를 하는 편이다. 5년전 처음 전업 사진기자로서 일을 시작한 뒤 사진기사 (스토리) 를 취재, 완성하기까지는 길어야 1-2주 걸렸던 것 같다. 덕분에 기사 수는 많았지만 어느 기사 하나 제대로 취재원의 삶을 공유하고 파고들며 작업한 기사는 없었던 것 같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비로써 심층취재는 장기적 안목을 갖고 취재를 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취재원의 삶을 제대로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한번 기획취재를 하는 데 최소 두달은 걸린다는 생각을 한다. 2004년도만해도 두달이면 여러 스토리를 취재했을 텐데, 지금은 한 스토리만 할 수 있다.
올해는 초반부터 여러 대륙을 넘나들며 힘들게 보냈다. 1월부터 파리를 거쳐 브라질의 리우데 자네이루에 3주 체류했고, 다시 파리를 거쳐 서울로 온뒤 1 주일 후 또다시 파리와 케냐의 나이로비를 거쳐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에 가서 두달간 취재를 했다. 처음 브라질 출장은 세계보건기구 (WHO)의 의뢰로 브라질 빈민가의 결핵상황을 취재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프랑스의 ‘피에르 & 알렉산드라 불라 협회’의 후원을 받아 민주콩고에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심층취재를 열심히 한 것까지는 좋았는 데, 문제는 취재비를 너무 많이 지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콩고에 있을 한 결심은 ‘내가 이번 취재가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개인적인 사진기획취재는 잊어버리고 무조건 돈을 벌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다고 프리랜스 사진기자가 일확천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저런 기획취재를 하다보니 사진작업이고 뭐고 내가 먼저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2009년이 한달 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후회가 막심하다. 올해에는 내가 너무 사진작업을 게을리했다라는 자책감이 든다. 인생 뭐 얼마나 길다고, 혹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다고 이렇게 작업을 안했을까. 작업을 안했다는 뜻은 단순히 사진을 찍은 행위만을 안한 것이 아니다. 내가 중요하고 귀하다고 생각하는 약자의 목소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 그리고 그러한 약자의 스토리를 발굴하는 일과 그들의 모습을 담는 일을 게을리 했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사진 작업을 하는 것도 돈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5년전에는 취재비가 200만원만 모여도 우리나라를 떴다. 그 때는 작업의욕이 너무나 왕성해 시쳇말로 ‘빌어먹는’ 한이 있더라고 현지에서 꿋꿋이 지냈다. 사진에 대한 열정만 갖고 너무 지나치리만큼 순진하게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이스라엘 탱크와 장갑차가 팔레스타인 소년 시위대를 향해 쉴새없이 최루탄과 고무탄을 터뜨리는 가자지구의 피난민촌에서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상황에서도 나는 사진을 찍었었다. 가자지구에서 시위현장을 취재하다가 현금 500 달러를 도난 당했을 때, 현지 통역자 집에서 더부살이를 살면서도 사진을 찍었었다.
그런 열정이 이제는 사그라든 것일까. 지금은 옛날보다는 예산규모가 좀 커졌다. 여전히 최소한의 경비로 1-2 달러에 벌벌 떨며 생활을 해도 말이다. 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취재를 더 할 생각을 못했다. 그 알량한 ‘생업’에 매달리느라 민주콩고에서 돌아온 뒤 지난 5개월여를 부질없이, 알맹이 없이 지낸 것이다.
이제 올해도 얼마남지 않은 지금, 그러지 않아도 나는 내가 목숨을 잃을 정도의 고생을 하며 그 무엇엔가 홀려 빌어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가자 지구에 다시 가려고 한다. 오는 12월27일은 작년 이스라엘 군이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백린탄 등 대량살상폭탄을 무자비하게 터뜨린 ‘가자 전쟁’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가자지구는 내가 사진에 내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뒤 곧바로 방문했던 곳이다. 그곳에 돌아가 5년전 초심을 다지는 것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인들의 아픔을 이번에는 함께 부둥켜 안고, 슬퍼하며, 가슴으로 뜨겁게 느끼고 싶다. 그래야만 올해가 덜 섭섭하게 지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