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나의 신앙체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유병록 2009년 12월 334호
종교를 가진 사람도 있고 안 가진 사람도 있다. 나는 계속 종교를 갖고 있으며, 인생의 절반은 기독교인으로 살았고 나머지 절반은 불교인으로 살고 있다.
우리 집안이 기독화한 것은 어머니부터다. 어머니는 시골 부농집안으로 시집와서 어른 상, 머슴 상을 포함해서 한끼에 일곱 차례 상을 차려야 하는 고된 시집살이를 하였다. 그 어머니가 애처로왔는지 당시에는 파격적인 결정으로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교회에 보내셨다.
따라서 나도 요즈음 얘기하는 모태신앙인 기독교인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들판을 가로지르고 내를 건너서, 다시 논을 몇 개 지나면 조그만 동산에 아담한 교회가 있었다. 지금은 동산과 나무를 다 없에고 커다란 교회 건물만 들어차있어 추억에 간직되어있는 아름다운 시골 교회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시골 교회라 목사님은 안 계시고 전도사님이 예배를 주관하셨다. 한 번은
헌금하라고 받은 동전으로 화약을 사서 신나게 놀았는데 누가 일러바쳐서 혼 난 기억도 있다. 성탄절에만 떡을 타러 나타나는 아이들이 밉기도 했다. 여름성경학교에서 1등하여 우리 집안이 동네에서 우쭐한 적도 있다. 우리 동네는 광산 김씨와 광산 이씨의 집성촌인데, 우리 또래 아이들 중 누가 더 공부를 잘하는지가 큰 관심이라 서로 들 자기 집 아이가 공부를 잘 한다고 자랑하는 상황이었으나 당시 시골에서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직장 때문에 나주에 떨어져 살고 계시던 부모님과 방학을 보내고 시골에 돌아와서 여름성경학교가 절반 쯤 진행된 상태에서 시험을 봐서 1등을 했다. 할아버지와 삼촌이 동네에서 큰 소리를 칠 만도 했다.
기독교계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통달했고, 교회의 성경퀴즈대회에서 우승은 당연히 나의 몫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 학생회장으로 출마했다. 당연히 내가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기독교계 ㅁ고등학교 출신들이 교회에서까지 ㅅ고등학교에 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선거당일 학생들을 집단으로 참가시켜 몰표를 주는 바람에 선거에 떨어졌다.
사관학교 3학년 때는 새벽기도까지 다니는 등 종교생활을 열심히는 했으나 근본주의 신자는 아니었고, 천지창조, 부활, 재림, 기적 등에 대해서는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인생무상이라는 의미에 관심이 많았고, 초파일날 할머니를 따라 동화사에 가서 할머니들이 춤추고 노시는 것을 본 적도 있고, 1년에 한 번은 소풍지가 동화사였다. 동화사 산길과 절에서 물 마시던 기억 등 절이 어렸을 때 추억의 일부분이 되는 등 불교인으로서의 인연도 가지고 있었다.

1981년은 24살 되는 해로써 사관학교 4학년 후반기 시절이었다. 4학년이 되니 엄격한 일과 속에서 긴장으로 보내던 사관학교 생활에 익숙해지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종교활동 시간(당시에는 의무였음)에 성당에 가서 미사드리는 것도 보고, 한 번은 법회가는 동기를 따라서 호국사에 들어서는데, 반야심경 낭송하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속이 확 트이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하급자시절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면 마음이 편해졌던 것과는 다른 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 다음 종교활동 시간부터 계속 호국사에 나갔다. 당시 호국사는 의자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때 3배 할 줄도 모르고 법회 의식절차도 잘 몰랐지만, 길거리에서 파는 반야심경 테이프를 사서 구수한 노스님이 독경하는 운율로 반야심경은 외운 상태에서 수계를 받고 임관을 하였다.
수계를 받고 정식으로 불교신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체질화된 교회생활(지금도 흥이나는 찬송가가 많이 있음)로 기독교인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종교를 비유하자면 불교는 수공업자가 만든 상품을 현지에 찾아가서 구입해야 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문만 나서면 구할수 있는 공장의 생산품 같이 접하기 쉬운 종교라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교회나 나가볼까 하는 순간에 교회에 가지 못하게 막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든 교회앞에 “단군성전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걸린 것이다. 당시 “환단고기” 등을 읽으면서 고대사와 민족주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것을 포기하였지만 신심이 깊지 않은 상태에서 절을 찾아간다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중위 때 흑산도에 근무하였다. 섬 생활은 무료하고, 업무의 강도는 매우 높은 반면에 스트레스를 해결할 방안이 없었다. 앞 마을에 커다란 교회를 보고는 다시 교회에 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젊은 수병들과 의기투합하여 불교 종교활동을 주관하므로써 불교와 가까워진 계기가 되었다.

신심이 깊은 현재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를 따라서 절에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조용한 산사의 고즈넠한 밤과 절밥은 내 취향과 잘 맞았다. 해인사 새벽 예불 때의 스님들의 우렁찬 반야심경도 좋았고, 상원사의 반야심경은 운율이 좋았고, 용화사의 예불 운율도 매우 좋았다.
백련암, 용화사, 학림사 등에서 용맹정진에 동참하는 아내는 불교인으로 20년 이상을 보낸 내가 아직도 3배밖에 할 줄 모른다고 놀린다. 그러나 나의 3배속에는 귀의법 귀의불 귀의승의 다 들어있다. 또 나의 기도 속에는 부처님의 법이 온 누리에 퍼지고, 국태민안하며, 불제자와 가족들이 부처님의 지혜와 가피를 받도록 하는 내용이 다 들어있다. 또 불법을 수호하는 장수, 나라와 바다를 지키는 장수, 불제자들의 모범이 되는 장수가 되겠다는 큰 서원도 들어있다.
팽창해가는 우주와 양자 역학 등 현대과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불교이론의 과학성, 전쟁이나 인종탄압을 하지 않는 불교의 역사, 자연과 함께하는 친 환경적 교리와 수행, 화합, 평화, 내면의 성찰 등 너무나 자랑스러운 불교 교리와 마음 수행이 좋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계속 할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세계종교사상사”를 강연한 적이 있다. 호국사에서 종교관을 발표하기도 했다. 나의 최종목표는 공부를 완성하고 전국 사찰을 돌면서 우주와 생명의 탄생과 역사를 접목한 불교의 어려운 교리를 쉽게 강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