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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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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해인총림 방장 법전 스님 2009년 12월 334호

치자가중좌癡子家中坐하야
문인멱귀로問人覓歸路라.
각피개맹아却被箇盲兒하야
지종별처거指從別處去로다
바보는 집 안에 앉아서 집으로 가는 길을 묻고
도리어 장님의 지시에 따라 엉뚱한 곳으로 가는구나

건봉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오직 하나의 길로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였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열반의 경지를 체득한 하나의 길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에 건봉 선사는 주장자를 집어 들고 공중에 선 한 줄을 긋고는 말했습니다.
“여기에 있다.”

건봉 선사는 당나라 때 절강성 월주 땅에서 활동했으며 동산 양개 선사의 법을 이은 조동종의 대선지식입니다. 그를 찾아 온 납자는 한길로 통하는 열반의 문울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찾는 것처럼 열반의 문도 따로 있는줄 알고 던진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건봉 선사는 열반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허공에 한 개의 선을 그어보였으나 깜깜한 납자는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건봉 선사는 죽은 말도 고쳐서 살려내는 명의였지만 그 납자는 죽은 말보다 병이 더 심한지라 도무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납자는 건봉의 명성을 익히 알고서 찾아오기는 제대로 하였으나 그의 안목으로는 건봉의 말귀를 결코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건봉 선사는 크게 알려진 선지식은 아니지만 운문 선사와 문답 몇개가 선가에 전해옵니다.
이를 통해서 건봉 선사의 살림살이를 얼마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아있는 법문 모두가 운문 선사와의 문답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선사께서 어느 날 법상에 올라가 말했습니다.
“하나를 들 것이요, 둘을 들지 말 것이니 하나를 놓치면 제2에 떨어지리라.”
그 때 운문 선사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어제 누군가가 천태天台에 와서 다시 경산徑山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건봉 선사가 말했습니다.
“별좌야! 내일은 운력을 하지말아라.”

또 어느 날 이었습니다. 건봉 선사가 상당하여 말했습니다.
“법신에는 세가지 병病과 세가지 광명이 있다. 이를 낱낱이 터득해야 비로소 편안히 앉을 줄 알 것이다.
그러나 다시 비침과 작용이 동시(조용동시照用同時)인 위로 향한 한 구멍이 있음을 알아야 되느니라.“
그러자 운문 선사가 나와서 말했습니다.
“암자 안의 사람이 어째서 암자 밖의 사람을 보지 못합니까?
그러자 건봉 선사는 크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운문이 되물었습니다.
“여전히 제가 의심하는 곳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건봉 선사와 운문 선사의 문답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대는 이게 무슨 마음씨인가?”
“화상께서 알고 계신줄 알았습니다.”
“바로 그렇게 해야 비로소 편안히 앉을줄 아느니라.”
“예. 그렇군요.”

어쨋거나 건봉 선사로 부터 열반의 경지를 향한 길에 관한 대답을 얻지못한 어리석은 납자는 할 수 없이 다시 운문 선사를 찾아갑니다. 이미 건봉과 많은 선문답을 나눈 운문의 이력을 알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똑같은 질문을 또 던집니다.
그때 마침 운문 선사는 들고 있던 부채를 위로 올리며 말했습니다.
“이 부채는 뛰어오르면 33천의 천상까지 올라가 제석천의 콧구멍에 붙고, 동해에 있는 잉어를 한방 치면 곧바로 뛰어올라 갑자기 그릇에 담긴 물을 뒤엎은 것처럼 비를 쏟아 붓는다.”

사실 민믈에 사는 잉어가 바다에 있을 까닭이 없는 것처럼 열반의 한 길을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알고보면 건봉은 깊고 깊은 바다 속으로 걸어가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는 격이고, 운문은 높고 높은 산봉우리에 서서 천지에 가득한 물을 넘치게 하는 형국입니다.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경지는 사량분별로는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원융무애한 시방세계 부처님의 열반 경지를 체득하는 길은 사량분별로 접근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건봉선사는 주장자로서 허공에 하나의 선을 긋고서 그러한 경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열반의 길에서 주장자를 수백번 든다고 해도 캄캄한 납자는 여전히 그렇게 수백번 같은 길을 깜깜하게 걸어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후세의 학인들이 만약 두 화상을 흉내 내어 주장자를 들고 선을 긋는 것을 열반의 길이라고 하거나, 부채를 들고 시방의 제불이라고 주장하며 형식과 모양을 흉내 낸다면 이는 그 자리에서 삼십방으로 두드려 맞을 일입니다. 본분자리에서 본다면 건봉은 사실 발을 들기도 전에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고 운문은 혀를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설명이 끝나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밝은 사람이 들으면 건봉은 간곡하게 자비를 다하여 근기에 맞추어 이끌었고, 운문은 방편을 교묘하게 베푼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당장 마른나무에 꽃이 피고 식은 재에서 다시 불꽃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건봉은 머리를 흔들고 운문은 꼬리를 친 까닭에 고금에 남의 입길에 오르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선지식의 이런 고준한 법문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은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렵다거나 혹은 쉽다는 생각을 구태어 내면서 일부러 망상을 지으니 비록 미진겁을 지나더라도 깨달을 기약을 없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공부인이라면 절대로 허공에 쓸데없이 못을 박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활시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일부러 가서 마음을 내어 끈을 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자연히 두 종장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산승에게 만약 열반문의 그 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장 방망이로 등줄기를 때려줄 것입니다. 또 길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하며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무섭게 그리고 산이 떠나갈 듯한 할로써 그 자리에서내 쫓을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건봉 과 운문의 지나친 자비가 결국 그 어리석은 납자의 눈을 더욱 가리게 했으니 두 종장의 허물이 참으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결제대중들은 두 선지식의 뜻만 궁구할지언정 두 노인네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거나 말끝을 따라가서는 절대로 안될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발 밑에서 열반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열반길은 화두를 열심히 제대로 참구할 때만이 그 해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득의즉반정도이귀가得意則返正道而歸家하고
심언즉탕사도이전원尋言則蕩邪途而轉遠이니라
뜻을 얻으면 바른 길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말을 찾으면 삿된 길로 흘러 더욱 멀어지느니라

2553(2009) 음 10월 15일 동안거 결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