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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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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무영/해인사승가대학 강사 2009년 11월 333호

몇 년 전 일본 닛코[日光]를 여행할 때였다. 그곳에는 일본의 에도시대를 연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무덤이 안치된 동조궁[東照宮]이 있다. 궁의 정문 왼쪽에는 신큐사가 있는데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며 말하지 않는다”는 상징의 세 마리 원숭이가 새겨진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원숭이 조각을 보면서 불전(佛典)에서 말씀하신 “보는 대로의 인간이요, 듣는 대로의 인간이며, 말하는 대로의 인간이고, 생각하는 대로의 인간이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본래 이 원숭이 조각은 나쁜 것을 보지 않고 나쁜 말을 듣지 않으며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물론 이렇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좋은 것을 보고 좋은 말을 들으며 좋은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최상일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하여 강원(講院) 사미(沙彌)반에서 공부할 때 중강스님으로부터 처음들은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씀은 아직까지 나의 수행적 삶에 나침반이 되고 있다. 만일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는 등의 선적(禪的)인 구절을 처음 접하여 가슴 깊이 새겼다면 참선의 길로 갔을지도 모른다. 진공묘유란 일체의 망상을 떠난 진리는 증감(增減)이 없지만[眞空] 그것이 현실을 오묘하게 생성하고 전개한다는 의미이다. 처음 들었을 때 이 알듯 모를 듯한 구절은 -잠시 선방을 다녔지만- 20여년을 불교학연구라는 한 길을 가도록 이끈 동기가 되었다.
진공묘유란 다른 말로 “연기즉공(緣起卽空)”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 말씀이 내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출가 전 나는 상대적인 분별의 세계에서 옳고 그른 대립적 가치관 속에 살았다. 즉 헤겔의 변증법적인 인식으로 세계를 사유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었다. 그런데 불교를 처음 접하여 연기의 현실계와 공의 절대계가 상즉(相卽)한다는 가르침은 아직 대립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내게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나를 불교교학의 세계로 이끌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데 그 원인은 바로 대립적인 분별인식으로 불교의 즉자적(卽者的) 교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진공묘유라는 구절은 불교의 핵심적 교설을 잘 나타낸 표현이라고 하겠다. 즉 연기의 측면인 묘유(妙有)와 공의 세계인 진공(眞空)은 불교사상사의 씨줄과 날줄이다. 중기 대승불교의 두 축인 중관학과 유식학도 진공의 측면과 묘유의 측면을 좀 더 강조하면서 다른 교학을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시대 상황에 의해 어느 한 쪽을 보다 강조하면서 각각 다른 학파를 이루었을 뿐 불교의 본령인 연기와 공이 상즉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좋고 나쁜 것이 상대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좋은 것을 보고 좋은 말을 들으며 좋은 말을 하고 살기는 정말로 쉽지 않다. 어쨌든 소극적이기는 하더라도 나쁜 것을 보지 않고 나쁜 것을 듣지 않으며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인생을 잘 사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궁극적인 수행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진공묘유의 도리에 입각하여 우리는 어떻게 불교를 실천해야 할까.
6조 혜능대사가 5조의 의발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자 이것을 뺏으러 쫓아온 도명에게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하라. 정당임마시(正當恁麽時)에 나개시상좌본래면목(那箇是上座本來面目)이닛고.”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 어느 것이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결국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는『금강경』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즉 “선악에 치우치지 않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은 진공묘유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현실적으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실천이 바로 진공묘유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수행과 마음공부는 공(空)이든 유(有)든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비교적 수행의 초기에 들었던 다음과 같은 말씀도 지금까지 나를 수행으로 이끄는 성구(聖句)이다. “중 보고 중노릇하라. 중 보고 중노를 하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상반된 두 구절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과 유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수행을 하게 이끌었다.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의 악(惡)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선(善)한 모습을 보고는 그냥 무시하는 사례를 종종 보게 된다. 선악(善惡)이 개오사(皆吾師)라고 하였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 가운데 선지식이 바르게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밖에 있는 선지식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선지식이 눈뜰 때 선한 경계에 대해서는 내 행동에 있어 좋은 귀감으로 삼고 나쁜 경계에 대해서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역시 그것으로부터도 배우게 된다.
진공묘유를 진공즉묘유(眞空卽妙有)로 바꾸어 표현해 볼 때 여기서 즉(卽)은 중도(中道)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다행히 출가하여 불교를 처음 접하는 순간 불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3제, 즉 공제(空諦)와 가제(假諦)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를 “진공묘유”라는 구절을 통해 만났던 것이다. 앞으로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眞空] 인연에 따라 대승의 보살도를 실천하면서[妙有] 중도적 길을 가도록 서원(誓願)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