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두길-고증과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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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9년 09월 331호
최근 있었던 두 가지 사례, 즉 연등회燃燈會의 무형문화재 지정 추진과 임진왜란 당시의 승군 활동이 국가주의에서 기인했다는 논문 발표를 보며 불교문화의 지향해야 할 방향을 생각해본다.
지난 8월 7일 문화재심의위원회는 연등회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부결했다. 현재의 연등축제가 신라·고려 때의 등축제를 전승하는 데 고증과 재현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계종은 지난 1월“연등축제가 신라시대를 기원으로 해 고려시대에는 관청에서 행사를 주관한 국가명절이었던 연등회를 전승했다”면서 연등회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계종은 연등회와 관련된 세미나 등을 통해 지적된 내용을 보완한 후 내년에 다시 신청할 계획이다.
연등회가 큰 축제로 치러진 것은 고려 때부터다. 불교를 숭앙했던 고려시대에 연등회는 팔관회와 함께 2대 명절로 정착되었으며, 국가적인 행사로 연등도감을 두어 주관하였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는 관등觀燈놀이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관청 중심의 행사는 중지되었으나 민간에서는 민속행사로 남아 세시풍속으로 전승되었다.
1955년부터는 조계사를 중심으로 시내를 도는 행렬을 하였으며, 후에는 동국대-종로-조계사까지 행렬을 하였다. 1975년부터는 초파일이 국가공휴일로 되었으며, 1976년부터는 여의도광장-조계사에 이르는 행렬을 하였다. 1996년부터 연등회 전통을 전승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등행렬을 연등행렬로 명명하였다. 동대문-조계사에 이르는 연등행렬을 비롯하여 불교문화마당, 어울림마당, 화합한마당, 대동한마당 등의 다양한 연등마당을 연등축제로 이름 붙여 종합적인 축제로 전환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각 사찰에서 는 거리에 등을 내달고 경내에 수많은 등을 밝히는 등 공양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연등축제 홈페이지)
연등회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신청은 타당하다. 온 국민이 함께하는 축제라는 점도 그렇거니와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등을 밝히는 행위를 통해 널리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는 다짐을 되새긴다는 의미는 등불보다 더 밝은 빛임에 분명하다. 더욱 철저한 고증과 재현이 이루어져 온 국민이 즐기는 연등축제가 되기를 바란다.
연등회와 달리 재평가해야 할 문화가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호국불교다.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임진왜란 때의 승군활동을 꼽는다. 보살행과 이민행利民行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여긴다.“단순한 애국행위가 아니라 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보살행 즉,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이상의 현실적인 응용”(정병조, 사명대사 유정의 사상과 불교사적 위치, 사명당기념사업회 제1차 사명당 기념학술회의 자료집; 사명당의 생애와 사상의 조명, 1997)이며,“그토록 박해를 받던 그들이 한번 국난이 일어남에 오히려 신명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던 것은 불교인 본연의 자세로서 <중략> 한국불교의 호국정신과 승려의 애국 이민행이 살아 있는 좋은 증거”(김영태, 한국불교사개설, 경서원, 1986)라는 것이 승군 활동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였다.
백성들의 생명의 안위가 위태로운 지경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행위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임진왜란 때의 승군 활동도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고 나라를 구한 보살행 이민행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의 한 논문은 임란 당시의 승군 활동에 대한 재평가를 요청하고 있다. 문제의 논문은 8월 22일 보조사상연구원의 87차 정기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박해당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의‘광해군(1575~1641)시대 대표적인 고승들의 국가의식.’박 씨는“임란 당시 의승활동의 잘잘못에 대한 판단 이전에 그 행위가 어디에서 연유했나, 살생에 임하면서 불교 가치를 구현하려는 고민이 보이지 않았다”라면서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근왕주의와 국가주의가 승군활동의 동인이었다고 분석했다.(불교포커스,‘임란의승활동은 국가주의에서 기인’, 2009. 8. 24)박 씨는 논문에서 <청허집> <허응당집><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 등의 내용을 분석하고,“광해군 시대의 승려들은 보우 이래로 휴정과 유정 등에 의해 계승된 근왕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국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여 불교교단을 국가적인 목적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 조선 후기의 세속권력에 의하여 조장되고 강화되었다”고 주장했다. 박 씨가 국가주의의 근거로 제시한 당시 스님들의 문집을 보면, 박 씨의 주장을 그냥 뿌리칠 수 없다.
“지금 신의 나이가 이미 51세가 지났는데 지난 세월 모두 임금님의 은택이니, 승려로서 세상 밖에 산다하여 어찌 감히 밥 한 그릇 먹을 틈인들 임금님과 어버이를 잊겠습니까?”(송운대사분충서난록, 한국불교전서 8:90하)“신이 본래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군사적인 일은 알지 못하지만, 한 명의 적이라도 죽여서 임금님의 끝없는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어찌 양반관료들만 못하겠습니까.”(송운대사분충서난록, 한국불교전서8:91상)
박 씨는“불살생의 계율을 받은 수많은 수행자들이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이유로서 유정이 내세운 것은 오로지‘임금의 은혜를 갚을 의무가 있는 신하된 이의 도리’일 뿐, 어떠한 불교적 명분이나 근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면서, 조선 중기 고승들이지닌 국가주의의 근원은 허응당 보우에게서 유래한다고 보았다.
“여래의 서원으로 대비전하의 마음 씀을 생각해보면 서원과 마음 씀이 다른 적이 없고, 대비전하의 활동을 여래의 일과 비교해보면 활동과 일이 같지 않았던 때가 없다. 그래서 여래는 곧 대비전하이시며, 대비전하는 곧 여래이시다. 여래는 곧 과거의 대비전하이시고, 대비전하는 곧 현재의 여래이시다.”(<나옹잡저> 중 ‘사경발\', 한국불교전서7:578상-중)
박 씨는“그 결과 조선 후기 불교교단은 자신에게 닥치는 세속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대해서조차 저항하지 못하는 체제순응적인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사회적인 비판세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끝내 적극적인 주체로 서지 못한 채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양상은 세속권력과의 관계를 늘 고민해야 하는 오늘의 불교인들에게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무거운 과제를 던져준다”고 강조했다.
박 씨의 주장대로 임란 당시의 승군활동이 국가주의의 발로였다면, 자랑스런 전통이 아니라 불살생의 가르침을 팽개친 부끄러운 역사가 될 것이다. 나아가 더 많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부득이 살생에 임했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에 견주어 고뇌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위의 두 사례로 불교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한 더욱 철저한 고증과 재평가가 뒤따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