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찔레와 장미는 같은 장미과다. 그 중 찔레는 일찌감치부터 수많은 꽃들을 희희낙락 피워 난분분히 흩날리면서도 또 흐드러지게 튀밥 튀듯이 핀다. 가시의 고통을 이겨내 안간힘으로 끝끝내 꽃 한 송이 피워 올리는 장미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꽃이 더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삶의 방식이 더 옳은 지도 말할 수 없다. 진효 스님은 두 꽃의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며 허허 웃었다. 스님이 산중 선방에 앉아 공부하는 것과 저잣거리에서 몸 부딪쳐 공부하는 것 중, 어떤 삶을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문득, 내가 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지? 라는 의문이 들면, 글쎄 그냥 이 일을 하게 됐어! 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요. 인연인 것이지요.”
지난 7월 민족공동체추진본부의 사무처장을 맡게 된 진효 스님의 말씀이다. 더불어, 이 세상 모든 꽃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소중하다며,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모든 사람의 일이 다 소중하듯, 스님도 그것에 부합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일한단다.
“감기약 먹듯이 먹고 낫는 것이면 좋겠는데, 남북관계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가야할 길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하고 있어요. 하지만 잠자는 형태는 아닐 것입니다. 곧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겠어요?”
민추본은 불교계에서 유일하게 대북사업 단체로 출범했다. 그런지도 얼추 십년 째, 많은 성과물들이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리고 스님은 그간의 십년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올 십년을 모색할 것이란다. 사회 정서를 비롯해 남북 관계도 변한 만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단과 정부의 의식과 지원이 품을 넓혀야 할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정책을 개발하고 활발한 교류를 해나갈 생각이다.
진효스님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는 총무원 상임감찰, 사서국장, 사회국장, 재정국장, 감사국장 자리에서 일했다. 출가 이후 삼십년 동안, 제대로 한번 쉬어본 적 없이 일 속에 묻혀 살았다. 지금의 자리로 오기 전, 처음으로 6개월을 쉰 게 스님 인생의 첫 휴가였다.
“일에 묻혀 살았어요. 삼십년 동안 공부만 했으면 지금보다 더 지혜로운 스님이 되어 있을 텐데…. 젊어서부터 나를 반추하는 시간보다 바깥을 보는 상황에 더 익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스님은 후배나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젊은 시기엔 외적인 상황보다 자기 내면부터 보라고, 그러고 나이가 들면서 그 탄탄한 내면으로 냉철하게 밖을 내다보라고.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이 요즘 들어 생각이 많이 나요. 젊을 때 늙은이의 사고와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나이가 들어선 젊은이의 행동과 실천력이 필요하다고.”
스님은 8년 동안 강화도 정수사 주지로 지냈고 올해 봄부터는 동두천 서광사 주지를 맡고 있다. 스님은 주지 소임을 하는 것도 공부의 한 과정이었던 것 같단다. 주지야말로 시행착오를 하지 말아야 하는 자리인데 사람살이다 보니 지금껏 실수도 많았던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검증된 자리여야 하는데 검증 받는 자리가 돼요. 그래서 참 괴롭지요. 옛날에 큰 스님들이 젊은 우리한테 늘 했던, 주지는 팔지 보살???? 정도가 돼야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이 생각나요. 옛날엔 몰랐는데, 완벽한 인격을 갖추고 제 일선에서 구현해 내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스님은 앉아서 하는 공부를 더 했어야 하지 않나, 너무 진하게 몸으로 체득하는 공부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며 겸손히 시선을 떨구었다. 어떤 공부법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스님은 후배들이 주지 소임은 물론 종단이나 사회로 나갈 때 이념부터 잘 무장되어야 할 것이란다.
10월24일은 스님의 출가일이다. 올해로 꼭 삼십 년이 되는 그날, 스님은 출가했던 해인사에 가볼 생각이란다.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삼십 년을 찬찬히 뒤돌아보고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란다. 멋진 스님으로 살아야겠단다.
스님은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해인사에 찾아갔다가 만난 은사 스님을 따라가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래서인지, 살다가 가끔 자신에게 회의가 들고 고심이 생길 땐 성지순례 하듯 해인사를 찾는단다. 절 마당의 어둠에 깃들어 그렇게 초심을 들여다본단다.
“중노릇을 잘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부처님을 만난 것은 천만다행이지 싶어요. 2500년 전에 부처님이 계셨던 건 인류 역사의 빛이에요.”
부처님의 말씀 중에서도 스님에게 가장 강하게 와 닿은 것은 부처님이 인도 땅에서 사성제를 말씀하시며 계급을 부정하셨던 부분이다.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이 시대, 인류가 평등권에 대한 문제를 법률적으로 해결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계급혁명이나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통해 인류는 오래도록 평등을 갈구했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단순한 것이지요.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다, 그것이 부처님의 일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 본연의 소중함은 사라지고 사람이 자본에 의해 평가되는 시대에, 스님은 사람이 경제적 동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묻는다. 스님은 지친 모습으로 출근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절에 찾아오는 어머니들이 기도하는 자녀들을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현실은 끝없이 자본이 사람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심의 거리에서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에게 돈을 위해 참고 견디며 사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 굴레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바세계, 감인의 세계라고 하지만 이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는 참아내는 데도 위로가 필요하지요. 부처님의 평등성은 나를 참아내게 하는, 살아내게 하는,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게 하는 충분한 이유로까지 의미가 있어요. 부처님을 만나 영혼이 구원된 것 같아요.”
오래 전에 우리가 이런 구조 안에서 살지 않았던 것처럼, 언젠가 사회 구조가 또 바뀔 것인데 그 근간에 부처님의 말씀이 있을 것이라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그래서 조금 더 평등한 세상이 되지 않겠나, 그래서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민추본 일에 있어서도 평등을 기본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북 관계에 단순히 이념적 문제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풀어야 할 게 무엇일까 늘 고심하는데 아직 답은 모르겠어요. 종교는 상처 난 곳에 붕대를 묶듯 위로의 말만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종교는 대안이라기보다 위로의 말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종교가 대안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지요.”
도심 한복판의 마당이 예쁜 커피집에 앉아 스님과 나누는 평등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아주 오래전의 옛날 얘기 같기도 하고 아주 먼 미래의 얘기 같기도 했다. 하지만 또 고개 돌리면, 바로 손 뻗어 닿을 곳에 있는 현실 같기도 했다. 어쨌든 무더운 오후에 스님의 바람들은 팍팍한 마음을 달달하게 적셨다. 그 말들이 텁텁한 도시인의 목구멍을 시원하게 했다.
스님은 문득 강원도 속담을 말했다. ‘아들이 셋이면, 큰 아들은 효자들 만들고 또 한 아들은 나라의 충신을 만들고 한 아들은 범에 물려 보낸다’는 것이다. 범에 물려 보낸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엔 누군가의 헌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진효 스님은, 승려야말로 세상을 위해 제 몸을 헌신하는 사람들이니 범에 물려 산으로 간 아들이 아니겠는가 한다. 그래서 속가의 어머니께 곱씹어 들려드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침 스님 속가의 형제가 셋인데다가, 부모님을 모시는 큰형이 있고 나랏일을 하는 둘째 형이 있어, 범에 물려 간 아들인 스님은 어머니께 당신은 정말 좋은 일을 하시는 거라고 얘기하곤 한단다.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에서의 출가를 세상에 대한 회피나 도망이라고 여기는 부정적 사회 인식이 절대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그런 면에 있어 스님은 더욱 중요한 속담이라고 했다.
“제 출가는 거룩한 부처님의 뜻이라기보다 이 사회에 희생, 헌신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함인 것 같아요. 그러나 현재, 내가 범에 물려감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행복해졌나 생각해보면 때론 부끄러워요. 그래서 늘 그 속담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스님은 매일 법당에서 부처님께 드리는 기도가 있단다. 아침 행선 축원 중에서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말인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이 그것이다. 내 이름만 들어도 지옥, 아귀, 축생의 삼도가 면해지고 내 형상을 보기만 해도 해탈을 얻는다는 뜻이다.
“생각만 해도 기쁘고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늘 기도합니다. 범에 물려간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커피를 마시던 스님은 사람들이 두런두런 둘러앉은 커피집 마당을 보며 이렇게 편한 절을 만들고 싶단다. 휴식 공간이 적어 기도만 하고 가는 불편한 절이 아닌, 아무 데나 앉을 수 있고 언제든 찾아가고 싶은 휴식처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할 사찰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스님이 요즘 하는 일 중 하나는 텃밭을 가꾸는 일이다. 올 봄에 가지, 고추. 깨를 심어 밭에서 풀도 뽑고 채소들 가꾸며 소일을 한다.
“흔히들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작은 텃밭 가꾸며 살자는 낭만을 품잖아요. 저도 마침 토굴 앞에 작은 텃밭이 있어서 낭만을 품고 시작을 했죠. 그런데 농부의 노고에 대해 여태 입으로만 떠들었던 것 같아요. 이건 낭만이 아니었어요. 정말 진해요. 하지만 몸은 고되도 한 이랑 한 이랑 메다 보면 마음은 편해요.”
현장에서 바쁘게 살아온 스님의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사는 게 낭만이 아니었어요. 참 진해요. 하지만 몸은 고되도 한 걸음 한 걸음 가다보면 마음은 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