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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깥 경계와 마음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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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 - 김계유 2009년 07월 329호
자기의 생각과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글도 있고 말도 있으며 소리도 있고 그림도 있다. 그러나 글이나 소리 혹은 그림 등이 아니라도 세상에 파장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것은 이미 자기를 들어내서 표현한 게 된다. 고려 의왕毅王 때의 일이다. 그는 평소 왕으로 있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 하며 놀기만을 좋아하였다. 정언(正言)의 자리에 있던 문극겸은 이를 걱정하여 임금에게 간절히 만류하는 글을 소로 지어 올렸다. 그러나 임금은 극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극겸은 탄식하며 집에 돌아와 자신의 안타까움을 시로서 적었다.
“주운(朱雲)이 난간을 꺾음은 이름을 구함이 아니며
원앙(袁盎)이 수레를 막은 게 어찌 제 몸을 위함이랴
한 조각의 작은 정성 하늘이 몰라주니
파리한 말 채찍질해 머뭇거리며 물러왔네.”
하였다.
그 후 경인년 봄에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왕이 남쪽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계사년 겨울에 새로 이 역을 수리할 때에, 화공을 불러 벽에 단청을 하였다. 당시 화공은 꽤 널리 알려진 솜씨의 장인으로 성은 박씨로 되어 있으며, 이름은 수록하고 있지 않다.
그림의 대강은 흰 옷에 갓 쓰고 말 탄 사람이 시름없이 말 가는대로 산길을 따라 서서히 멀어져 가는 모습이었다. 이는 누가 보아도 처량하게 느껴지는 행색의 그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곁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이를 보아도 무슨 그림인 줄 알지 못했다. 다만 송광사의 무의자가 이 역에 투숙하였다가 이 그림에 담긴 속뜻을 처음 알아보고 길게 탄식하여 말했다.
“이것은 바로 바른 말하는 신하가 서울을 떠나가는 그림이다.”
고 하며 시를 지었다.
“벽 위에 이 그림을 뉘 그렸던가.
바른 말하던 신하 서울 떠나니,
일의 위태로움이여
산승이 그림 보아 오히려 서럽거늘 나라에 벼슬하는 사대부임에랴.”

이처럼 한때의 권력 앞에 무력하던 문극겸의 외로움이었지만 보는 자는 보고 기억하는 자는 기억하면서 이미 그의 정신은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도, 군자가 그 집에 머물면서 밖으로 내는 말이 선하면 곧 천리 밖에서도 호응하며 집에 머물면서 그 내는 말이 선하지 못하면 천리 밖에서도 어긴다고 하셨으니 무엇을 다시 새삼스러워하겠는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오직 자기의 내면세계가 천지자연의 법도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할 일이요, 남에게 보여 지는 자기의 이미지에 결코 연연할 일이 아님을 우리는 이 가르침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호가 삼봉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전의 고사를 하나 더 소개해 보자.
그가 어느 날 관청의 공석에 앉아 있을 때였다. 신이 하나는 희고 하나는 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따라온 아전이 그 사실을 가까이서 일러 주었다. 그러나 공은 신발을 한 번 내려다보며 천연스럽게 웃어넘기며 개의치 않았다. 대신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에 앉아 자기를 따르는 하인에게 그 점에 대해 덧붙이기를,
“네가 내 신의 검고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보되,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 쪽에서는 검은 것만 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걱정될 것이 없다”
하였다. 겉치레가 아닌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필원잡기상의 언급이다.
남계는 그의 문집에서 그의 행적을 두고 말하기를, ‘조선이 들어서고 모든 나라의 규모와 시설이 공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편집한 가운데 일관一款은 또 재상의 대체를 깊이 얻었다. 따라서 후세에 반드시 여기서 취할 것이 있을 것이다’고 평하고 있다.
하나의 잘못이 있으면 그의 모든 생애가 그 잘못에 묻히고 마는 세태의 아쉬움, 이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찌꺼기에 휘둘려 살아가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일 것이다. 어찌 성인께서 거짓을 말씀했겠는가? 오직 어진 자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달리 말하면 수행의 측면에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마음의 문제를 떠나지 않는다.
바깥 경계가 아닌 자기 마음에서 세상의 본질을 보려고 하는.
그래서 육조 혜능대사의 법을 이은 일숙각은 자신의 편지글에서 이렇게 후학들을 깨우치고 있다.
“도를 보고 산을 잊은 자는 번잡한 인간사가 오히려 고요하고 산을 보고 도를 잊은 자는 고요한 산중이 또한 시끄럽다. 반드시 오온이 비어 내가 없는 줄 알게 되면 무아이거니와 ---육진 경계가 자기 자신을 흔들어 모순을 이룬다면 어떻게 사람이 세상의 고요하고 시끄러운 여건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의 성품은 깊고 텅 비어 만물이 본래 번뇌가 없다. 참된 경계는 평등하니 바깥 경계의 소리와 색깔이 어찌 도가 아니겠는가. 다만 소견이 전도되어 번뇌가 되면서 드디어 자신을 얽매며 윤회를 이룬다. 만일 누구나 경계가 비어 자취 없음을 깨달아 알면 눈에 부딪치는 것이 진리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눈 밝은 선지식의 눈 밝은 가르침! 그는 세태에 휘둘리고 물질에 농락당하는 지금의 우리들이 진정 천금 무게의 보물로 가슴 깊이 새겨 살아가야 하는 삶의 본질 문제가 아니겠는가 싶다. 세상이 어지럽고 쓰레기 같은 가치들이 횡횡한다고 답답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