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위가 슬금슬금 등을 간질인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해 이맘쯤이면 긴 소매를 걷어붙이며 깜짝 놀란다. 눈 끔뻑하는 사이에 찬 서리 가고 뙤약볕 쏟아져 제법 물쿠다. 그러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누군가는 오고 또 누군가는 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 그러나 가고 없는 사람 앞에서 아무리 울어봤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겁나게 부담 되네요.”
소탈하고 숨김없는 말투. 전남 무안이 고향이라는, 지금은 함평에 사는 스님의 사투리가 여간 구수한 게 아니다. 뜨거운 여름, 시골에서 어찌 지내시는지?
“장화 신고 여기 저기 일하러 다니죠. 스쿠터에 음료수 매달고 논밭 사이길 다니다가 일하는 보살님들 만나 한 잔씩 따라드리고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그러지요. 그런 소소한 행복 속에 있어요.”
보살님들이, 바빠서 초하루에 절에 못 왔다고 끌탕을 하면, 스님은 괜찮다고, 내 자체가 찾아가는 포교당이라고 한다. 이것이 탁발 아니겠냐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자전거를 타고 논밭을 달리던, 지금은 가고 없는 한 대통령의 모습 같다. 장화를 신고 마을을 다니며 일하는 모습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과 흙 위에 주저앉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모습도 그렇다.
“주지 소임 마치고 절을 떠날 땐 숟가락 하나도 갖고 가지 말아야지요. 절에 들어올 때 들고 왔던 내 책 몇 권만 걸망에 넣어 나가야지요.”
이것이야말로 5년간의 소임을 위해 청와대로 들어가는 대통령의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내 것이 어디 있겠나, 다 국민의 것이고 중생의 것이고, 바로 그것이 내 것인 것을. 그러나 잠시 눈멀면 그 마음도 잊고 마는 법. 그러니 누구라도 스님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살 일이다. “죽기 전에, 먹은 것만큼 토해놓고 가야 할 것 아닌가.”
먹기만 했다간 과부하 신호가 오는 법. 스님은 신도들에게 말한다. 자신의 첫 마음이 변한 것 같거든, 행동이나 말이 변했다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 달라고. 때론 자신도 모르게 거만해 질수도 있고 아집에 휩싸일 수도 있으니 항시 눈을 뜨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99명이 스님에게 잘 살고 있다고 말해도 1명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이 역행 보살이라 해도 그것이 보살이기에 스님은 존경을 표한다. 자신을 점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절차탁마(切磋琢磨)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거창한 한식집보다 길거리 음식이 더 맛있어요.”
오후에 본 스님은 길 위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비싼 커피집의 원두커피보다 덜 맛있다고 누가 말하겠나. 여쭙는다, 스님의 원력은 무엇입니까?
“표교지요. 어떤 포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 있는 것.”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머물러 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스님은 어디든 달려가고 누구든 만난다. 그것이 스님의 포교법이다. 그러기 위해 스님은 지역 문화와 축제를 활성화시키고자 애쓴다. 그럼으로써 산중 사찰과 도심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인연의 끈을 맺기를 바란다.
함양 용천사는 1800년 고찰이라지만 건물이 모두 소실 돼, 10년 전 스님이 용천사 주지로 왔을 땐 건물이 두 채뿐이었다. 초파일이 아니면 절에 오는 사람이 1년에 100명도 안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뒷산을 산책하던 중 눈에 든 게 있었다. 뒷산 수십만 평에 자연스럽게 핀 새빨간 꽃, 꽃무릇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이 굶지 말라고 저 꽃을 보여주셨구나. 꽃무릇은 본래 절과도 인연이 깊은 꽃. 옛날 사찰에선 그 뿌리를 갈아 탱화 밑에 붙은 천에 발라 좀먹지 않게 했다. 천연방부제였던 셈이다. 게다가 배고픈 시절엔 먹기도 했던 뿌리다.
“빨갛고 화려한 그 꽃을 보고 있으면 코피가 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예쁜 꽃은 향기가 없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 정열을 바쳐 꽃을 피우다 보니 향기를 잃은 것 같아. 그리고 꽃이 화려하니 향기로 벌과 나비를 오게 할 필요도 없는 거지. 어쩌면 향기가 없는 꽃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어요. 물도 진수무향(眞水無香)이라 하잖아요.\"
사람이야말로 그렇지 않을까. 짙은 향으로 현혹시키기보다 때 되면 그 자리에서 늘 피어나는 꽃 같은 사람이 진인(盡人)이며 진인(眞人)이 아닐까.
스님은 꽃무릇을 보게 된 그날부터 장화를 신고 논밭과 산을 휩쓸고 다녔다. 군에 가서 설득을 해 논밭을 엎어 주차장을 만들고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꽃무릇 공원, 산책길, 원두막을 만들고 천석 규모의 야외극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꽃무릇 축제를 열었다. 그러기 위해 1년 중 300일은 장화를 신고 지냈다. 그렇게 시작된 꽃무릇 축제가 올해로 벌써 11회째다. 관광객이 40만명 정도 찾아든다.
“그 사람들이 전부 다 절로 오진 않죠. 하지만 한명도 빠짐없이 이렇게들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 용천사 밑에 꽃무릇 보러 갑시다!”
꽃무릇 축제뿐인가. 함평 나비축제에도 함께 하고, 함평 관광지 벨트화에도 힘쓰고 있다. 그 외에도 스님이 할 일은 많다. 용천사 주변이 워낙에 청정구역이다 보니 스님은 제초제를 비롯한 농약을 일체 쓰지 않는다. 그렇게 텃밭에 가꾸는 채소도 산의 야생 녹차도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제 생명을 지탱하게 한다.
“오던 해에 보니 저수지에서 두꺼비 수천마리가 부화를 하더란 말이죠. 이곳을 보존해야겠다 싶었지. 이곳은 동식물의 보고예요.”
물 사정이 좋은 함평은 우리나라에서 연꽃이 제일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절 밑의 천 평이 넘는 연못에 연꽃이 피었고 넓은 면적은 아니더라도 함평 전역 곳곳에 연꽃을 심었다. 그것도 스님이 나선 일이다.
“곧 연이 유행할 거예요. 녹차, 매실 유행하듯이. 음료도 나올 거고 음식도 개발되고 미용, 의학, 의류까지 연이 쓰이지 않을 곳이 없을 겁니다.”
어디 연에 대한 관심뿐인가. 손수 녹차와 녹차된장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마을사람들에게, 스님이 없어도 꾸준히 해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장화 신고 손에 흙 묻히며 10년을 살았다. 그 사이 불사도 10여 채나 했다.
“부처님 일이고 용천사 일이라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무릎 꿇을 자신이 있어요. 내 개인적으로는 한없이 자존심이 강하지만.”
스님은, 기반시설 갖추는 일을 제법 마물렀으니 이젠 어떤 스님이 주지로 와도 포교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스님은 각 사찰들이 이렇게 나름의 방향성을 가져야함은 물론, 스님들도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라는 바탕에서 제 나름의 싹을 틔워야죠. 큰스님들께 허벌나게 혼날 말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앞으로 스님 중에 의학 전문가, 한학 전문가, 법률 전문가 등 다양한 인력들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이 계곡을 타든 강을 타든 집 앞을 흐르든 물이잖아요. 모든 물이 꼭 계곡을 타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선방에서 지내는 것만을 인정해 줄 것이 아니라 소임에 충실한 것도, 복지관 종사나 방송을 하는 등 여타의 것도 경력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스님은 생각한다.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불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중생들 속으로 들어가기 수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스님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만 해도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 근처에 심양사라는 절에 우연히 친구 따라 가게 됐다. 그 이후로도 공부가 힘들 때나 마음이 힘들 때면 찾아갔다. 어느 아침, 법당에 들어가 앉았는데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부처님께 내려앉았다. 그 이후로 아침마다 법당에 들렀다가 학교에 갔다. 그러고는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다가 3학년 때 출가를 결심했다. 그렇게 집을 나와 8년 동안 소식 하나 없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 긴 세월동안, 스님보다 먼저 정을 뗀 것은 어머니였다.
스님은 승가대를 졸업하고 서울 염창동과 김포에서 포교당을 열기도 했다. 그러고는 동국대에서 복지학과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2005년엔 총무원 사회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복지는 부처님 법의 일부분이에요. 작가가 되는 건 속가 때부터 내 꿈이었고.”
스님은 시집도 서너 권 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한두 권 나눠주는 것이 기쁨이라 올해나 내년쯤엔 한권 더 낼 생각이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하지만, 그 바쁨 중 산중 생활은 어떠실까?
“배를 타고 바다에 가면 어디서든 내가 세상의 중심이지만, 산에 들면 내가 있는 곳이 세상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지요. 산이 울면 견딜 수가 없어요. 하심(下心)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지요. 허나 자연의 품안에 들어가면 새가 먼저 날고 풀이 먼저 누우니 자연스레 하심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별과 나무와 바람을 스승으로 여기며 살지요.”
스님은 그렇게 산중에서 자연과 함께 사신다지만 나와 같은 중생은 대체 어찌 살까 싶은데, 스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장화를 신고 펄쩍펄쩍 돌아다니지 않느냐고, 몸을 쉴 새 없이 돌리지 않느냐고.
“신도들이 찾아와서 살기 팍팍하다고 하면 절을 신나게 시켜버려요. 뼈에 사무치도록 무언가 노력해 본 적 있어요? 무르팍이 까지도록 일심으로 부처님께 절 해봐요. 그렇게 해서 겉껍데기를 다 걷어내고 나면 내 모습이 나와요. 거기에 약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된단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무릎이 다 까지도록 절을 해 껍데기를 없애라니. 결국 그것은 상(像)을 없애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러고 나면 문제의 원인과 결과가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말씀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원인도 처방법도 자기 안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게 아닐런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했어요.”
스님은 마지막 한 마디로 서둘러 자리를 뒤스르고 저녁 어스름 속을 허적허적 간다. 그 모습이, 애가 탈 때나 속이 꽉 막혔을 때 그리고 언제 어느 밥상에서든 찾게 되는 싱건 물김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