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방편 물의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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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 - 김계유
2009년 06월 328호
염흥방은 고려시대에 활동하던 인물이다. 그가 정자를 한 채 짓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아 머문다는 뜻에서 침류정으로 이름 붙인 뒤 그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체로 물의 성질은 맑은 것이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닿으면 뼈에 사무치기 마련. 그래서 마음의 혼탁함이 이에 밝고 맑아지며, 마음의 흔들림이 이에 고요하여 안정되며 상제를 섬길 수 있고, 사방의 온갖 만물을 이르게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늘이 물을 세상에 나오게 하면서 오행의 첫머리로 삼는 까닭이다. 생각해보면 만물이 번식하는 공은 모두 그 물에 있다. 이제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남의 집 문을 두들겨 물과 불을 구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물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공이 크다. (내가 정자의 이름을 두고) 흐름을 베개 한다는 침류라고 함도 물과 친하고자 할 뿐이요, 다른 뜻이 있음은 아니다.
먼저 흥방의 침류정을 예로 들었거니와 불교 경전의 하나인 ≪능엄경≫은 그 의미 해설이 보다 본질적이다.
“저는 물의 성품이 (몸과 세계 밖의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 본질에 있어서 차별이 없음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었나이다. 저는 물의 성품이 한결같이 흐름을 관하여 무생법인을 얻음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원통(圓通, 사물의 이치가 두루 통함)이라 하겠나이다.”
월광동자가 말하는 수대원통水大圓通의 내용이다. 수대원통이란 세상의 본질을 자각하는 방편으로 가장 수승한 매체가 바로 물의 공덕에 있다는 ≪능엄경≫의 일절이다.
이들 문헌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물의 공덕은 그 시사하는바 상징성이 매우 구체적이다. 한없이 자기를 낮추어 남의 때를 씻어 세상을 맑고 윤택하게 하면서도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물. 그래서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저 낮고 넓은 바다에 도달할 때까지 잠시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만약 사물이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고집해서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당연히 썩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변하고 바뀌는 세상의 이치를 보여주며 끊임없이 변하며 흘러가는 까닭에 월광동자는 그를 통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하는 기쁨을 상기시킨다.
이에 ≪논어≫에서도 공자는 물을 가리켜“흘러감이여 오직 이와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라고 읊는다.
공자가 물에서 바라보는 흐름은 쉬지 않고 흘러내리며 되풀이되고 있는 도의 유행이다. 봄이 왔는가 싶으면 여름이고 다시 가을과 겨울의 연속이다. 그래서 높은가 싶으면 어느새 낮은 자리로 돌아와 있고 만사가 잘 풀려 가는가 싶다가도 또 막히는 때도 있다. 가면 오고 오면 가는 이치, 평평하다 보면 기울고 기운 뒤에는 다시 평평해진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초조해하랴.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할 까닭도 없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근심할 이유가 없다. 비록 공자의 한마디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의 속성에 반영된 세상의 의미를 한번쯤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경계로 인하여 분별심을 내고 분별심을 따라서 괴로워하는 우리의 삶, 거기에서는 우리의 진정한 의식의 주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물은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하는 한 구절의 가르침이 있다.
“저 허공이 너희 마음에서 생긴 것이 마치 한 조각 구름이 맑은 허공에서 일어난 것 같거든, 하물며 허공을 의지하여 있는 여러 세계일까 보냐? 너희들 중 한 사람이라도 참된 성품을 발명하여 근본으로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온통 부서질 것이니, 허공을 의지하여 있는 국토들이 어찌 허물어지지 않겠느냐.”
우리의 의식이 발 딛고 선 땅은 여기에서 말하는 허공에 의지한 세계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삶의 본질을 깨닫고자 하면서 목욕을 하다가 물을 보고 그것을 분명하게 깨닫는다는 다음과 같은 공안도 있다.
“우리들은 처음 위음왕부처님께 법을 듣고 출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목욕할 때에 차례가 되어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물의 성질을 인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티끌을 씻음도 아니요 자체를 씻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서 편안해져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습기가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금생에 와서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무학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무슨 뜻일까. 설두 화상은 거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인다.
“자 너희들은 이 일을 뭐라고 하겠느냐? 그들이 영묘한 접촉으로 불성이 홀연히 나타나 크게 깨우치고 부처가 되었다고 한 뜻을 알겠느냐? 모름지기 어디서나 자유무애하게 도에 이를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터득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견해의 초점은 설두가 강조하듯이 자유무애함에 있다.
티끌을 씻는 것도 아니요 자체를 씻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서 편안해져 씻어도 씻는 바가 없는 물의 공덕. 그것을 설두는 이 자유무애함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물과 관련된 수많은 경전의 가르침들은 그 핵심이 바로 사물과 접촉하면서도 사물에 물들지 않는 물의 자유무애함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물의 자유무애함을 자기가 남을 위해 한없이 봉사하면서도 항상 낮은 곳을 향해 흘러내리는 그것의 공덕에만 머물러서 그 의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와 동시에 마음의 움직임이 본질적으로 자취가 없는 이면의 특성도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이웃과 세상을 향한 우리의 어떤 아름다운 행동이나 종교적인 구원관조차도 오히려 더 큰 세상의 독으로 되지 않는 우리의 안목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여름! 시원한 물이 그리워지고 시원한 물을 찾아 보내고 싶어지는 그 무더운 여름! 필자도 이 여름에는 물이 그리워질 때마다 이 경구들의 의미를 하나의 아름다운 육성으로 늘 되새기게 되기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