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밤, 비가 제법 내렸다. 그 탓에 수도원 입구의 전선이 늘어지고 나뭇가지들이 꺾였다. 저만치서 스님이 전지가위를 들고 나타나 손수 나뭇가지들을 자른다. 널따란 마당이다 보니 여기저기 손닿아야 하는 곳이 많다. 스님은 절 마당을 가로지르며 꽃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진다.
“이건 조팝, 이건 매발톱, 저기 엉겅퀴는 내일이면 꽃이 피겠네요. 이건 상사화, 꽃은 잎을 못 보고 잎은 꽃을 못 보지요. 그리고 이건 후박나무, 이건 능수벚나무, 저건 산목련.”
대부분이 우리나라 야생종이다. 마당엔 꽃과 나무 그득하고 뒷산엔 스님이 열다섯 살 무렵부터 심기 시작했다는 나무들 울창하다. 한켠 텃밭에선 상추, 쑥갓이 푸짐하게 잘도 자란다. 설법전에서 내려다보니 청주 시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시내가 다 내려다보여도 아주 깊은 산속 같지요?”
절의 모양새가, 손길은 많이 갔으나 꾸밈이 없고 고즈넉하면서도 무겁지 않아 다가가기 부담스럽지 않다. 그러니 내남없이 둘러앉기 좋고, 둘러앉아 차 마시기 좋고, 설법을 듣다가 드러누워도 좋겠다. 꽃도 있고 새도 있고 차도 있으니, 좋고 좋다. 스님이 차를 달인다. 물주전자, 다기, 찻잔받침, 다포…. 어느 하나 맛깔스럽지 않은 게 없다. 하나하나 웬만하지 않다.
“꽃이 왜 아름다운지 알아요?”
스님은 묻는다. 아름답다는 것도 채 알지 못하는데, 왜 아름다운지는 어찌 알까.
“지기 때문에, 유한하기에 아름답지요. 생명은 지렁이에게도 하나, 바둑이에게도 하나, 올챙이에게도 하나, 나에게도 너에게도 하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뭘까요? 죽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외쳤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말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스님은 차와 글씨와 그림을 즐긴다. 방 안의 모든 그림은 스님이 손수 그린 것이다. 화폭 위엔 꺾인 소나무 가지와 달이 몇 개의 선으로만 존재한다. 다포 위에도 스님의 붓이 지나갔다. 찻잔받침은 스님이 뒷산에서 나무를 잘라 만들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찍찍 그어서 해놓으면 보기 좋잖아요. 내 그림에는 생략, 억제, 절약의 미가 있어요. 그게 바로 선, 단도직입적으로 존재의 실재를 직시하는 것이죠.”
‘찍찍’그렸다는 스님의 그림은 조용하고 담담하고 깨끗하다.‘찍찍’은,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찍찍’이다.‘대충’이 아니라‘욕심 없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더 맞겠다.
“한번도 내가 예술가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난 중입니다.”
스님이라 하면, 행위와 언사를 비롯한 모든 것이 다 불교적 표현이다. 의복이 그렇고 먹고 자고 깨어나는 것, 손짓이나 걸음걸이 하나 불교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없는 법. 그러니 스님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화가로서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미술사를 공부한 스님이다 보니 심미안을 갖고 조금 더 불교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뿐. 차를 마시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모든 것이 부처님을 향한 마음인 것이다.
“나는 내 자신 그대로가 박물관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머리 깎고 이런 옷 입고 이런 집에서 사는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스님은 2003년에 해인지에 <선이야기, 그림이야기>를 일 년쯤 연재했던 인연이 있다. 선화에 대해 일반 민중들이 너무 모르고, 또 스님들도 일반 민중들에게 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때가 런던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스님은 외국에서 오래 살았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한국 조계종단의 교육 체계가 세계적인 승려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한국에서부터 영어, 일어, 중국어를 혼자 공부했다. 언어는 절실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원효나 의상 대사는 세계적인 승려였는데 왜 현재는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스님이 나오지 않을까요. 한국불교의 지위가 왜 저 바닥일까요.”
스님은 교학 연구를 너무 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해야 지식이 쌓이고 그것이 지성, 견성이 된다. 많은 지식을 여과해서 종내에는 지식을 부정하는 자리까지 갔을 때 지성이 되고 견성이 되는 것. 견성성불을 위해서는 부처님의 경전부터 이해해야 할 것이란 말씀이다. 스님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을 말한다.
“버린다는 건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사교입선은, 교敎만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 교를 버리고 자성을 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은 뭘 버리나요? 아무 것도 없다면 오히려 교부터 가져야지요. 그런데 우린 아무 것도 없으면서‘선禪으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불교가 적어도 백 년 동안은 교학 연구를 해야 선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스님은 대만에서 예술대학으로 가장 유명한 문화대학으로 갔다. 그곳 미술학부에서 공부하며 혼자서 선화 공부를 끊임없이 했다. 석사 논문은 영산회상도에 대해서 썼다. 그러다가 대만에서 돈황학으로 유명한 런던 교수 로드릭 위트필드를 만난 게 연이 되어 다시 영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17년간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2002년에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절로 향했다. 현재 스님이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처음 찾았던 절이다. 스님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이었을 때 노스님 한 분이 스님의 속가를 찾아왔다. 하도 이상하게 생겨서 무얼 하는 분이냐 여쭈니 노스님은, 사람이 왜 태어나서 왜 죽는지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지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때 마침 소년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노스님께 어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줄 수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노스님은 그것을 알고 싶거든 당신에게로 와 직접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날 밤부터 소년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때의 노스님은 바로 소년의 종조부였고 지금의 절을 창건한 분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그 노스님을 찾아가 스님이 되었고 현재 그 절의 주지로 살고 있는 것이다.
대한불교수도원은 전국에서 어린이 법회를 최초로 한 곳이다. 그 시작이 1953년도였으니 종조부 스님은 포교에 큰 뜻을 둔 분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며 현재의 절에 3년을 살았다. 그 시절 우리나라의 유명한 스님들은 다 이 절에 와서 설법을 하셨다. 그중 화봉 유엽 스님은 말씀하셨다, 정말로 스님이 되고 싶거든 해인사로 가라고. 그 다음날 학교에 가다 가방을 집어던지고 바로 해인사로 갔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이 절에서 살림 살던 보살님이 나를 발심시켰어요. 나를 못 살게 하고 울게 만들고 인생을 회의하게 만들었어요. 저 넓은 마당에 앉아 밤새 이슬을 맞으며 공부길을 찾아갔죠. 분발심이 일어 해인사로 갔어요.”
완행열차를 타고 대구에서 마지막 버스를 타고 겨우겨우 가니 밤 9시가 넘어 캄캄했다. 1966년, 수도도 전기도 없던 시절, 눈앞에 손을 놓고 흔들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더듬어 해인사를 찾아갔다. 일주문 지나 봉황문에 섰는데 문은 닫혀 있고 사천왕상은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계곡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달려가 물로 배를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사천왕상 앞에 서서 생각했다. 20년만 지나봐라, 내가 해인사 주지일 것이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너무 소리를 지르니까 머리끝이 바짝바짝 서대요. 그런데 갑자기 문이 삐그덕 열리더란 말입니다. 강원 졸업반 스님이 신부락에 잠깐 마실 가려고 나왔던 거였죠. 나는 그 길로 행자방에 들어가 행자생활을 시작했어요.”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통도사 강원을 졸업했다. 그러고는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2002년에 돌아왔으니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나라는 많이 변해 있었다.
“성철 스님을 일 년간 시봉하던 때가 있었어요. 머리를 깎을 때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잘해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조그만 저한테 머리를 숙이셨죠. 그게 수행이에요.”
계율에 자신의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깎지 말라고 했다. 스님이란 자는 공부도 혼자 하고 밥도 혼자 탁발해 먹으니 남에게 부탁할 일, 머리 숙일 일이 없다. 그러니 한 달에 두 번 머리를 깎으며 머리를 숙이라고 있는 계율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이다.
“승가, 즉 쌍카는 공동체 생활, 공동체 운명, 공동체 이익을 말해요. 이것이 본래 승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즘 스님들은 같이 살기를 싫어해요. 자기 머리를 자기가 깎아요. 파계예요.”
스님 방에 채 마르지 않은 찻잎이 널려 있다. 손수 감잎을 따 군불을 때서 만든 차라며 달여주는데 그 맛이 구수하고 달큼하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스님은 좋아하는 일도 놓치지 않고 살려 한다. 스님께 여쭙는다. 안락하십니까?
“오늘 하루가 너무 좋죠, 차 달이고 꽃 보고 그림 그리고. 비감에 젖을 때는, 이 시대를 살면서 부처님의 제자로서 기여하는 바가 약하다 싶을 때. 민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부족할 때. 그들 옆에서 위로해 주고 힘이 되면서 살았으면….”
방문 앞엔 스님이 그렸다는 달마대사가 서 계시다. 스님과 똑 닮았다. 단출하고 정갈한 스님의 살림과도 똑 닮았다. 앞마당의 고요한 연못과도 똑 닮았다. 어디 하나 스님과 같지 않은 것 없고 무엇 하나 부처님께 가는 길 아닌 것 없다. 모두가 여여如如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