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등명 자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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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윤대녕
2009년 06월 328호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밤풍경을 내다보며 나는 온갖 사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게 아무 것도 가르쳐준 바 없이 냉혹했기에 나는 어둠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왔다. 그리고 스스로 등을 구하고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숱한 방황을 거듭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아주 조금의 깨우침일지라도 스스로 구하는 법을 터득한 게 아니었을까.
여섯 살 무렵이니 대략 사십이 년 전의 일이겠다.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난생 처음 절이라는 곳을 가보았다. 경내에 가득 걸려 있던 연등이 지금도 눈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할머니는 대웅전에 들어가 오래 머문 뒤에야 나왔다. 그날 경내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기묘할 정도로 분위기가 적막했다. 해가 기울어가는 오후의 적막 속에서 나는 연등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마당을 무연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저녁 무렵 할머니와 나는 절을 떠났다. 그때 마침 연등에 하나둘씩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연등 불빛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까지 구불구불 우리를 따라왔다. 내일이‘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산을 내려와서도 나는 절이 있는 쪽을 자꾸 올려다보았다. 산속이 불이라도 난 듯 환했다.
초등학교 이학년을 마칠 때까지 나는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부모는 먹고살기 위해 도회지로 떠났다고 했다. 삼학년이 돼서야 나는 부모에게 보내졌는데, 그것이 나로서는 부모와의 첫대면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사는 게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단칸방에 부모와 자식 넷이 함께 지내야만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얼굴은 보기조차 힘들었다. 언제나 새벽에 나가 자식들이 잠든 한밤중에나 돌아왔다. 어느 해인가는 아버지가 몇 달을 집을 비운 적도 있었다. 훗날 어머니에게서 들었는데 먹고살기 위한 방도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당신이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외아들인 내게 아무 것도 가르쳐준 바 없으면서도 조금이라도 잘못하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냉혹하게 대했다. 나는 점점 내성적으로 변했고 타인을 기피하는 아이가 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저없이 스스로를 어둠의 덩어리로 인식했다.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 나는 절로 들어갔다. 먼 옛날 할머니의 등에 엎혀 절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바야흐로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산길에는 연등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절에서 일 년을 머물며 불경을 읽고 가까스로 글(문학)을 구해 나는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소설가가 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의 어둠이 씻은 듯
말조차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한 달간 눈(雪) 속을 헤매기도 했다. 그리고 간신히 돌아오게 되면 나는 집이 아닌 절부터 찾아갔다. 그때마다 내가 마음속에서 되뇌인 말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마지막 법문이었다.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 진리로 등을 밝히고 스스로 등을 밝히다
법귀의 자귀의法歸依 自歸依 진리에 의지하고 스스로에게 의지하다
누구에게 발설하기조차 민망한 얘기지만 최근까지도 나는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십 년 동안 부모 자식간에 변변한 대화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부친은 이제 칠십대 중반이 되었으며 나는 사십대 후반이 되었으나 사춘기 때부터 시작된 반목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사춘기 무렵부터 나는 부친에게 반항을 했고 가출을 일삼았으며 대학 진학 문제에서 심지어는 결혼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부친의 뜻을 거역했다. 그런 만큼 부친 또한 나와는 아예 정이 없어 내가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한 마디의 말조차 따뜻하게 거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작년 가을 어머님이 노환으로 쓰러지셨다. 급히 기차를 타고 내려가보니 부친이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역시 변변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이삼 일 머물다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부친이 쓰러졌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그만 화해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어머니가 말했다.
“자식한테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거다. 네 아버지도 부모한테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미처 몰랐던 거다. 게다가 살기가 좀 어려웠니.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그래서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제 다 늙어서 자식한테 화해를 청할 수도 없지 않으냐.”
진통제를 맞고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밤풍경을 내다보며 나는 온갖 사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게 아무 것도 가르쳐준 바 없이 냉혹했기에 나는 어둠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왔다. 그리고 스스로 등을 구하고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숱한 방황을 거듭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아주 조금의 깨우침일지라도 스스로 구하는 법을 터득한 게 아니었을까.
어둠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나는 여전히 절을 찾는다. 오늘도 나는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수유리에 있는 삼성암에 다녀왔다. 엊그제 부모님이 이사를 했다. 자식들과의 오랜 숙의 끝에 근 사십 년 가까이 살아온 낡은 집을 떠나 아파트로 옮긴 것이다. 그 집은 부모가 반평생을 살아왔으며 자식 넷을 키워 출가시킨 집이기도 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옆에는 노인병원과 한방병원이 있고 앞으로는 겨울이 와도 더 이상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을 터이었다.
나는 대웅전 부처님 앞에 엎드려 부모님의 건강과 안식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