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에 대한 불교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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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승원
1999년 03월 205호
그리스 신화에 ‘아마조네스’ 라는 여인 천국이 나온다. 지금의 혹해 연안에 있으며 용맹한 여성 전사들이 지배하는 나라로, 이 곳에서 남자의 지
위는 한낱 여왕벌 앞 일벌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이마조네스 있다. 최근에 지구의 축을 흔들어 놓았던 르윈스키 사건도 정치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수천 년 남성의 우월적 지배에 대한 이마조네스 여성 전사들의 도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즘 직장마다 성희롱이 주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는 남성의 의식 저변에 여성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거나 성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심리가 잠재해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비뚤어진 성도덕은 심지어 성고문이라는 잔악한 범죄 행위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 동안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에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피해를 계속해서 방치할 수만은 없다. 또 국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절반의 역할을 담당하는 여성이 남성의 노리개나 부수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현실도 하루 빨리 고쳐져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남녀가 대등한 입장에서 두 축을 이루고 있으며 결코 지배, 복종관계가 아니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많은 남자가 아직도 잘못된 가부장제적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성희롱 십계명은 선언적 의미에서 벗어나 그 범위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여성의 다리를 그냥 보는 것은 괜찮고 야릇한 표정을 짓는 것은 안 된다든가, 잠깐 보는 것은 괜찮지만 한참 보는 것은 성희롱에 해당된다 등 알듯 말듯한 기준들이 ‘아마조네스의 경고장’처럼 날아들고 있다. 그 동안 얄궂던 남성들도 아닌 밤에 홍두깨가 날아올지도 몰라 꽤나 신경이 쓰인다는 반응이다. 모두가 상호 존경과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겪는 진풍경이다.
분명히 규제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실효성이다. 음험한 눈빛이나 얼굴 표정, 장난기나 고의성의 정도 그리고 야함의 범위 동은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도 있다. 게다가 그 기준이라는 것이 외국의 예를 참고한 것으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한 예로 자식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노인이 공원에서 어느 젊은 부부의 사내아이를 자신의 손주 대하 듯 귀엽다며 고추를 쓰다듬었다가 고소를 당한 어이없는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성희롱의 개념은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성희롱에 대한 확증은 어떤 행위를 한 사람이 성적 쾌락을 기대하고 있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에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남지들 스스로가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한 뒤 이를 꾸준히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왜냐하면 성희롱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억제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란 매우 간단하다. 나의 행위가 성희롱인지 아닌지는 어느 남자가 나와 똑 같은 행동을 나의 가족에게 했을 때 이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이 불쾌한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다시 말해서 어느 남자가 내 아내나 딸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옆 자리에 앉아 술을 따르라고 했을 때 이를 본 자신이 화가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히 성희롱에 해당된다.
이처럼 성희롱은 역지사지로 판단하고 풀어 가야지 그 범위를 인위적으로 정해 놓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유치한 방법이다. 한때 전철에 여성전용 칸이 있었지만, 이는 ‘남녀칠세부동석’ 만큼이나 억지였다. 이런 방법이라면 성희롱 문제도 일시적인 관심사로 드러났다가 여성 전용칸처럼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십계가 아니라 백계가 되어도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지강급미砥糠及米’ 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쌀겨만 핥다가는 결국 쌀까지 모두 먹어 치운다는 말이다. 성희롱은 어찌 보면 간단히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차츰 발전하여 돌이키지 못할 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히 성희롱에 대한 불자들의 의식은 더욱 적극적이어야 한다. 아직도 서양종교에는 여자 성직자가 거의 없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풍의 성인마저도 여자를 악마화하고 있는 데 견주어, 불교는 부처님 때부터 남녀가 동등한 지위에서 교단을 이루어 왔다. 부처님은 여성들의 사원 출입이나 경전 암송조차 금지되던 사회에서의 엄청난 저항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주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부처님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권 신장론자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성희롱은 불자들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생각해 보자. 스님 두 분이 길을 가다가 개울가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는데, 그 때 한 처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를 본 한 스님이 그 처녀를 얼른 안고 개울을 건넜다. 그리고 계속해서 길을 가고 있었다. 한참 뒤에 또 다른 스님이 입을 열었다. “수행자가 처녀를 껴안다니…”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나는 한참 전에 내려놓고 왔는데, 자네는 아직도 안고 있구먼…”
한 스님은 껴안는다는 생각 없이 한 중생을 다른 세계로 안내해 준 것이지만, 또 다른 스님이 보기에는 그 스님이 분명 처녀를 껴안은 것이었다. 만일 그 개울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까지도 스님이 여자를 끌어안았다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지금은 그 스님에게 성희롱 죄로 고소장이 날아들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지금의 세태에서 볼 때 그 스님은 처녀가 개울을 건너든 말든 오직 자신만의 길을 갔어야만 했다. 그냥 꼿꼿이 고개를 들고 브라만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같은 조직에서조차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는 마음아 없다 보니 이제는 상대의 마음의 잣대를 가지고 내 마음을 재야만 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아무리 내 마음아 사악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의 잣대에 따라 음험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나도 내 잣대를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재어 보고 싶을 것이다. 결국 서로가 밀고 당기면서 갈등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보다는 주위에 대해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사는 사람이 현명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폐증에 걸린 세상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안아주듯이, 수행자가 중생의 아픔을 껴안아 주는 자비행만큼은 변함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상사가 여자 직원의 등을 다독거려 주는 다정한 모습이 아름답게 비치는 직장 분위기도 계속되어야 한다. 물론 된장을 담되 구더기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구더기가 생긴다고 해서 된장을 아예 담으려 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문제이다. 서로가 경계의 눈초리만 번득이기보다는 조금 오해가 있더라도 아픈 마음을 토로하고 서로 쓰다듬어 주면서 사는 세상이 그래도 나올 것이다. 문둥이 보살조차 끌어안고 살던 경허스님의 무애한 마음처럼 지비가 흘러 넘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세속의 잡사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청정한 계율과 마음을 잃지 않던 유마거사의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