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비교

이전 게시물
해인리포트 - 지함 2008년 12월 322호
한 목적지를 선정하고 똑같이 출발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러므로 내가 속한 집단, 또는 나와 다른 수행법이
라 하여 하열下劣한 수행법으로 취급하는 것은 수
행자修行者로서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께서 수행법으로 삼
은 위빠사나와 현 조계종단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
화선의 정의를 파악하고 역사적 전개와 흐름을 살
펴, 두 가지 수행법을 비교·고찰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의 근본은 위빠사나와 간화선의 본
질을 어떻게 이해하고 열반·해탈의 길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본
질적 이해가 착실히 수행된다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선 수행의 문제점들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
이다. 그 문제 타파를 위한 대안이 적절히 제시된
다면 산 속 수행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참선 수행
자들에게도 큰 개안開眼과 활로活路를 제공하리라
기대해본다.
인간의 의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대상을 갖는 의식으로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이라
불린다. 오온의 흐름이 12연기이다. 다른 하나는
오온을 꿰뚫어보는 반야관般若觀이다. 전자의 수
행은 오온 내에서 대상에 정신을 통일하는 사마타
(samatha, 선정) 수행법이고 후자는 모든 대상을
가진 오온의 현상 이전을 반야관으로 꿰뚫어 본질
에 계합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부처님께서 판
단하시길, 사마타 수행법만으로는 시간 흐름의 반
복인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함을 인지하여 위빠
사나와 병행수행 하여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원한
열반을 증득하신 것이다.
우선 위빠사나는 팔리어로 vipassanā, 산스크리
트어로는 vipa·yanā이다. 이 말은 영어로 insight
또는 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돼 사용되고 있
다. 이 말은 접두사인 vi에 ‘보다’라는 뜻을 지닌
passati라는 말의 명사형인 passanā로 조합되어
있다. vi는 3가지로 해석 가능한데 첫째는 쪼개다,
분할하다의 ‘분석적’이고, 둘째는 떨어져서, 분
리해서의 ‘객관적’이며, 셋째는 꿰뚫어의 ‘통
찰·직관적’이다. 따라서 통찰·직관적으로 보
는 것은 분석적·객관적으로 보는 것의 다름 아니
다. 이렇게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생겨나고 사라지
는 현상을 관찰한다는 말인데 곧 무상에 대한 관찰
이다. 생겨나는 현상을 바로 그 순간 관찰하고 사
라지는 현상을 사라지는 그 순간 관찰하라는 말이
다. ‘무상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
겨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그 순간순간에 포착하
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그 어떤 현상이라도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것임을 철저하게 안다면 집착을 극
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를 지닌 마음은 깨어 있
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다.
간화선은 남송대 대혜종고스님(1089∼1163)에 의
해 주창된 수행법이다. 학자들은 무사선, 문자선,
묵조선의 폐풍을 극복하기 위해서 간화선이 등장
했다고 말한다. 첫째, 학자들은 남종선의 돈오가
무사선無事禪으로 오해된 폐풍을 들고 있다. 돈오
를 주장하는 남종선의 기본입장은 “깨달음의 성
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에 다만 그 마음을
쓰면 곧 바로 성불해 마친다(菩提自性 本自淸淨 但
用此心 直了成佛)”라는《육조단경》의 명제로 압
축된다. 이런 가르침은 후대로 올수록 “본래 부
처이기에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무사
선으로 오해되었다. 매순간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휘둘리면서도 탐·진·치는 본래 없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는 이른바‘불립문자不立文字’가‘불이
문자不離文字’로 되어버린 문자선의 폐풍을 들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양송 선종의 주된 흐름으로
이처럼 불립문자에서 불이문자로 표현되는 문자선
을 그 특징으로 들고 있으며, 이러한 폐해를 극복
하고자 묵조선과 간화선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셋째, 묵조선의 폐해를 들 수
있다. 본자청정을 좌선으로 확인하려는 묵조선의
입장을 대혜는 ‘묵조사선’이니‘아무 말 없이 흑
산 아래 귀신굴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니
하면서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것은 정작 투철
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식정의 분별로 본
자청정이라 여기고 그 경지를 좌선으로 확인하려
는 발상 자체가 미혹에서 나온 분별망상일 뿐이라
는 것이다. 대혜스님은 묵조사선의 병통을 치유하
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라 말한다.
위빠사나는 일차적으로 삼법인의 여실지견이며
화두선은 견성성불로 달리 표현되지만, 견성은 불
성에 대한 견성으로 달리 각성覺性을 의미하고 다
시 이러한 각성은 위빠사나의 무상·무아를 떠나
있지 않다. 즉 양자 모두 공空이나 여여, 실상 또는
진여에 대한 각성이고 여실지견으로 해탈을 이루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 수행도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토대 위에서
파생된 하나의 수행방법에 불과하다. ‘화두를 든
다’고 하는 것도 외부의 대상에 현혹되지 않는 선
정 위에서 찰나생, 찰나멸하며 흐르고 있는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참선 수행하는 모든 이
들에게 일어나고 있지만 그 세세한 전개와 개념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사마타, 위빠사나를 불교적 수
행방법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세태를 만든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틀에 박힌 수행 시간과 공간이
다. 50분 좌선에 10분 경행의 규격화된 형식보다
는, 두 세 가지의 집단을 각 공간에 나누고 좌선 시
간을 차별화하여 각자의 근기에 맞게 수행하는 것
이 자신에게도 또 타인에게도 더욱 효율적이라 생
각한다. 또 앉아서만 하는 수행이 아닌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하는 수행도 병행한다면 행주좌와 어
묵동정이 적극 실현될 수 있으리라 본다. 때로는
밭을 매면서 때로는 풀을 베면서 작동하고 있는 각
신체기관과 흐르는 마음을 관찰하여 선정과 집중
을 이룬 뒤 자신만의 화두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제방선원과 불교계 전반에 만
연한 ‘답답함’에서 시작됐다. 이 답답함은 말 그
대로 ‘갇혀있음’과 ‘탐구하지 않음’의 결합체인
것이다. ‘나’와 ‘저들’이 다르지 않고 ‘몸’과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경계를 알기 위해서는 먼
저 그것들이 서로 어디가 어떻게 무엇이 다른 지부
터 이해하고 알아야하는 것이다. 자신이 제대로 알
아야 제대로 행하고 발길을 옮겨 타인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