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방편 물의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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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샘 - 능인 김계유 / 한학자
2008년 12월 322호
이름이 흥방이었던 염동정이 침류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물을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즐거움을 추구한 내
력에 대해 기문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체로 물의 성질은 맑은 것이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닿으면 뼈에 사무치게 되기 마련. 그래서 마음의
혼탁함이 이에 맑고 밝아지고, 마음의 흔들림이 이에 고요하여 안정되며 상제를 섬길 수 있고, 사령(四靈)
을 이르게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하여 하늘은 물을 세상에 나오게 하고 오행의 첫머리를 물이 차지하게
하였다. 생각해보면 만물이 번식하는 공은 모두 그 물에 있다. 이제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남의 집에 문을
두들겨 물과 불을 구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물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공이 크다. (그래서 내가 정자의 이름을 두고) 흐름을 베개로 한다는 것은 물과 친할 뿐이요, 다
른 뜻이 있음은 아니다. 이것이 내가 <물에> 친하는 연유다.
이보다 앞서 불교 경전의 하나인 능엄경에서는 침류정에서 언급하는 물의 공덕을 하나의 매우 적절한 수
행의 방편으로 받아들여 그 본문에서 언급한다.
“저는 물의 성품이 (몸과 세계 밖의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 본질에 있어서 차별이 없음을 관하여 깨달
음을 얻었나이다. 저는 물의 성품이 한결같이 흐름을 관하여 무생법인을 얻음이 제일된 원통이라 하겠나
이다.”
월광동자가 말하는 수대원통의 내용이다. 그가 본질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고 하는 물의 종류는 우리가
지저분하다고 여기는 눈물과 콧물은 물론 대소변과 입안의 타액까지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도
덕경에서는 가장 수승한 사람의 선행은 바로 물과 같다고 하여 上善은 若水라는 비유를 들고 있기도 하다.
돌이켜 음미하면 모든 생명의 실상도 사실은 그 본질에 있어서 물 아닌게 없다. 그것이 우리가 물이 없이
는 단 하루도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또 다른 물의 측면을 생각하자면 쉼없이 흘러가는 성격이 있다는 바로 그점이다. 언제 어느 순간 어느 자
리에서나 물은 잠시도 멈추어 있는 법이 없다. 멈춘다면 그것은 썩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변하며 흘러
가는 세상의 이치 그대로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공자는 물을 가르키며 이렇게 읊는다.
“흘러감이여 오직 이와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
공자가 물에서 바라보는 흐름은 쉬지 않고 흘러내리며 되풀이되고 있는 도의 유행이다. 봄이 왔는가 싶으면 여름 다시 가을을 거쳐 겨울이 되풀이되곤 한다. 높은가 싶으면 어느새 낮은 자리로 돌아와 있고 만
사가 잘 풀려가는가 싶다가도 또 막히는 때도 있다. 가면 오고 오면 가는 이치, 평평하다 보면 기울고 기운
뒤에는 다시 평평해진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초조해하랴.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할 까닭도 없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근
심할 이유가 없다. 비록 군자의 삶이 아니라도 우리는 세상을 한번쯤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다. 경계로 인하여 분별심을 내고 분별심을 따라서 괴로워하는 우리의 삶, 거기에서는 우리의 진정한 의식
의 주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도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어야 할 공자의 아름다운 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하는 한 구절의 가르침이 있다.
“저 허공이 너희 마음에서 생긴 것이 마치 한 조각 구름이 맑은 허공에서 일어난 것 같거든, 하물며 허
공을 의지하여 있는 여러 세계일까 보냐? 너희들 중 한 사람이라도 참된 성품을 발명하여 근본으로 돌아가
면 시방 허공이 온통 부서질 것이니, 허공을 의지하여 있는 국토들이 어찌 허물어지지 않는가.
우리의 의식이 발 딛고 선 땅은 여기에서 말하는 허공에 의지한 세계의 모습은 아닐까.
어떤 사람은 삶의 본질을 깨닫고자 하면서 목욕을 하다가 물을 보고 그것을 분명하게 깨닫는다는 다음
과 같은 공안도 있다.
우리들은 처음 위음왕부처님께 법을 듣고 출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네가 목욕할 때에 차례가 되
어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물의 성질로 인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티끌을 씻음도 아니오 자
체를 씻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서 편안해져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습기가 없어지지 않
고 있다가 금생에 와서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무학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무슨 뜻일까. 설두화상은 거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인다.
“자 너희들은 이 일을 뭐라고 하겠느냐? 그들이 영묘한 접촉으로 불성이 홀연히 나타나 크게 깨우치고
부처가 되었다고 한 뜻을 알겠느냐? 모름지기 어디서나 자유무애하게 도에 이를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터
득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의 공덕으로 수행의 방편을 이야기하고자 하면서 문득 이 말을 덧붙이는 의도는 나름대로 다
른 곳에 있지 않다. 남을 위해 한 없이 봉사하면서도 항상 낮은 곳을 향해 흘러내리는 그것만이 우리가 물
에서 주목해야 하는 공덕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것을 자기가 취할 만한 공덕으로 내세워 자기 자
신만을 위한 선민의식으로 자기의 마음 안에 담아두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끝내 우리가 버리지 않는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쌓아올리는 훈훈한 세상의 일상적인 선행도 오히려 하나의 독이 될 수 있음
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바램때문이다. 일종의 각을 밝히고자 하는 그 노력이 허물이 된다는 능엄경의 覺明
爲咎사상에 대한 노파심과 통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점에 대한 우리의 투철한 자각이야말로 앞에서 예
로든 침류정 기문의 취지와 본질에 있어서 진실로 통하는 길임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
을 나는 특히 세상의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의 화두로 던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