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사 인근의 또 다른 사하촌, 마장리馬場里.
신라시대부터 형성된 오래된 마을로 절을 찾는 왕
실사람들과 귀족들을 위해 타고 온 말들을 쉬게 했
던 곳이라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마을 형성의 배
경에서도 알 수있듯 마장리는 마부들과 주인을 따
라 들어 온 하인들의 쉼터로 저녁으로는 흥청이는
주막 문화가 만들어졌다. 또한 6~70년대까지도
이 곳에 산판이 있어 드나드는 외지인이 많아지니
한때 가야산 인근에서는 제법 북적였던 마을의 역
사를 갖고있다. 그러나 이제 가야산은 해인사를 중
심으로하는 청정한 수행도량으로 자리를 잡아가니
떠들썩했던 예전의 마장은 간데없고 산골마을 농
사를 짓거나 조용한 삶을 위해 찾아드는 수행자들
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흙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가장 소박한 찻잔을 빚
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도예작가, 여상명씨(53세).
밝달가마의 주인으로 삶터인 마장리의 새로운 문
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해인사 고불암으로 가는 길. 솔향기 가득한 외
진 산길 도로를 따라 산 중턱으로 오르다보면 시원
하게 펼쳐진 산골 마을이 나타난다. 가야산의 해피
700고지라고도 할 수있는 청정마을, 마장리. 주로
고냉지 채소와 파프리카를 재배하는 조용한 고산
지대로 마을 앞 산이 된 가야산의 전경은 아침 안
개와 함께 마음에 담겨 선계仙界인 듯 세속에 지친
시름을 놓게한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삶터를 닮아간다고 했던가.
이 곳에서 생활하며 다완과 다관등 주로 차와 관련
된 그릇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도예가 여상명씨는
오랜 토굴 생활에 젖은 어느 은둔 수행자의 모습을
닮은 듯했다
“세간사람들의 수행은 별개 없어요. 스님들이야 워낙
지혜가 열려있어 더 큰 세상에 대한 구도심을 가지고 살
아가시는 분들이니까 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머리기
르고 사는 사람들의 수행이라면 마음 끄달림을 내려놀
줄 아는 정도면 된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측면에서 본
다면 지난 시간 여기와서 참 좋은 수행을 한거지요 ”
“ 드러분 자슥, 사발 마이 만들어라 ”
그리고 아내는 이미 포기한 듯 아무 말이 없었
다. 그도 그럴 것이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와 한국
굴지의 대기업 직원으로 남부럽지않게 살던 사람
이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며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니 아내는 아내대로 속
이타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식키운
보람을 잃어가고 있었다.
집안 8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와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
고 다니는 아들을 보는 것을 가장 큰 기쁨
이라셨던 어머니. 그러나 당시 상명씨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큰 기계와 같이 단단하고
때론 차가운 조직 속에서 하루하루 마모되는 부품
처럼 살아가는 듯한 직장 생활에 지루함을 더 이
상 견딜 수없었다.
“ 내가 조직문화와 안맞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그러나 당시 아이도 있는 가장이고 또 어머니도 있으
니 솔직하게 말할 수없더라구요. 참 많은 고민을 했지
요. 근데 내 성격 탓인지 한번 아니라 생각한 것은 더
이상 되돌려 지지 않더라구요. 지금도 이렇게 혼자 버
티며 살아낼 수있는 것은 바로 또 그 성격 때문이기도
하구요. 현실이 힘들어도 여기 내가 앉아있는 것이 옳
은 일인 듯 싶거든요.(웃음) 다 팔자 소관인가 봅니다.
인연이지요. ”
자신의 삶의 궤적을 어느 스님의 출가담인 듯 인
연이라는 말로 마무리 지으며 두고 온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내려놓는다.
“ 전공도 안한 사람이 그것도 서른 넘어 도예를 시작
그가 가야산에 들어 온 것은 14년 전인 지난 90
년대 중반. 늦깍기 도예작가로 출발하여 조금씩 세
상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작가
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늘상 그러하듯 그 역시
도 이름이 나면서 세간 이목에 책임감이 들고 이름
값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남모를 끄달림으로 삶의
긴장이 더해갔다. 작업은 진지해졌으되 건강은 날
로 쇠약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한겨울에도 얇은 옷차림이지만 당시는 여
름에도 내복을 입지않으면 안될 정도로 몸이 안좋았어
요.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라구요. 도시를 떠난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아내와 어머니에게 가야산으로 가마를 옮겨야겠
다고 말을 하자 작가로 사는 아들의 현실이 늘 불만
이었던 어머니는 대뜸 원망스런 말씀을 하셨다.
하는데 각오가 없었겠습니까. 죽어도 이 일을 하다가
죽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일이기에 완전하게 내 작품을
찾을 때까지는 이렇게 흙을 붙들고 여기 이 자리에 앉
아 있어야만 합니다. 나도 아들 보고싶고 집에 가서 마
누라와 편한 잠을 자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
닙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요”
누가 시킨다고 이 깊은 산 중에서 나 홀로 도끼
질을 해가며 천도가 넘는 뜨거운 가마 앞에 앉아
밤새 불을 때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간 작업을 통
해 얻은 자신감으로는 불을 다루는 소성과정과 가
마 실험만이 자신을 살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
럴수록 실험하는 마음이 더해져 요즘은 오히려 살
맛이 난다. 열정이 다시 지핀 것이다.
그의 나이 이제 50대 중반, 마흔에 잃었던 건강
도 되찾고 이십여년에 걸친 많은 실험을 통해 여
러 가지 자기만의 성격을 표현해 내는 지혜도 늘었
다. 흙이면 흙, 불이면 불, 유약이면 유약..처음에
는 마음이 앞서는 탓에 닥치는 대로 맨 땅에 해딩
하 듯 기준없는 실험을 거듭해 온 세월이었다. 다
된 듯하면 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정신을
차려 앞으로 나가보면 또 다시 제자리에 서있곤 했
던 절망감과 씨름하며 내심 실패한 삶에 대한 두려
움으로 마음을 죄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일에 자신이 붙고 알
음알이 지혜가 늘어나면서
물레를 돌리는 마음에도 편안
함이 있다. 여유가 생겨서 일까 요
즘은 그 옛날 아내가 들려줬던 걱정
스런 말들이 가끔씩 떠오른다.
“ 내가 처음 도자기를 할 때 뭘 알아서 한 것도 아니
고 그간 취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거든요. 당시 하도 실
패하는 바람에 위축된 마음 반, 오기 반으로 생각을 한
거지요. 어떤 일이든 다음에 하게되는 일이 있다면 무
조건 그 일로 승부를 걸자라는 결심을 한 겁니다. 그러
다 어느날 길을 걷다가 문득 뜬금없이 찻 잔을 만들어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이 차이고 그간 다구가게를 하며 찻잔도 직접 팔아봤으
니 일단 해보면 잘 될 것같더라구요. 그래서 덥석 물레
부터 사들고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처음에 아내는 소일
삼아 마음을 달랠 겸 시작한 일이려니 생각했나 봅니다.
근데 거의 두문불출하고 몇 달을 그렇게 들어앉아 물레
만 돌리니 어이가 없었던거지요. 근데 내가 하도 진지
하게 달려드니까 막지는 못하고 어디 학원이라도 다니
며 배워서 하라고 충고를 하더라구요. 근데 그 말이 들
리지 않았어요. ”
이제와 돌아보면 아마 사회적으로 무능해진 사
내가 아내에게 부리는 못난 심술에다 아만심我慢
心을 더해 아내를 힘들게 했던 듯 싶다. 대학시절
부터 불교청년회를 다니면서 차 맛에 깊이 빠지다
보니 삼십이 넘어서는 미각이나 차를 우려내는 실
력이 왠만한 다인茶人보다 낫다는 칭찬을 자주 듣
곤 했다. 차 모임을 통해 좋은 다완 고르는 눈도 익
혀 온 터였다. 무엇보다 차를 사랑하는 다도인으
로서 다완을 만드는 분들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것
들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미덥지
못한 생각들로 인해 젊은 시절, 배움의 기회를 놓
쳤고 결국 더 많은 시간을 돌아 오늘 이 자리에 오
게 되었다.
“ 돌아보면 무모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한편 돌아보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
한 일이기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노력하지 않았는
가 생각해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제 몸 힘들게 한다고
내가 딱 그 짝이 났지만 처음 결심 그대로 잘하던 못하던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한다는 약속은 지금껏 지켜 온 것이
니 그 뚝심이 나를 살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
지난 2002년부터 올해까지 6년간, 개인전만도
무려 14번. 그 외 4회에 걸친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최근 더욱 활동적인 모습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
는 여상명씨.
아마츄어로 시작해 지금은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장인 정신의 작가로 인정받기까지 자신과 싸우며
침묵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예술인
이 아닌 예도인으로서 생활의 깊이 하나를 더해주
니 이를 가르쳐 준 것은 바로 가야산. 마장리의 깊
은 골 맑은 물소리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