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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울로 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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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진현 2008년 09월 319호
\'내 저울로 달지 말라\'
진현 / 서울 불지사 주지


중학교를 다니다가 집을 나와 한 암자에서 또래 아이를 보았는데 그만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너, 여기에 어떻게 왔니?”
‘여기 스님이 내 삼촌이야’하는 대답을 듣고 다시 내가 물었다.
“나도 여기서 같이 살면 안되니?”
아이가 친절히 일러 주었다.
“여긴 방사가 좁아서 같이 있을 수 없어. 큰절로 내려 가서 스님을 찾아뵙고‘행자로 왔습니다’하고 말씀드리면 될거야.”

불교는 물론 행자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열다섯 어린소년이 집을 나와 설악산으로 가서 울산바위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들른 암자에서 그런 마음을 내었으니 필경 전생사였을것이다.
큰 절로 내려가서 입승스님을 뵙고 아이가 일러준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행자로 받아들여졌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칠년 전인 1971년 겨울 설악산 신흥사에서였다. 또래 행자들 다섯이서 한방을 쓰면서 새벽에 일어나 예불을 드리고 마당 쓸고 눈 치우고 장난치면서 겨울을 보냈다.

스님 한 분이 우리 행자 다섯과 함께 한방을 쓰면서 통솔해 주셨는데, 미국 대원사를 세운 대원 스님이었다. 당시 신흥사 주지스님은 고암 노사의 상좌이신 문성준스님이셨고 지금 경기도 육지장사 회주이신 지원 스님이 총무스님이었다.

주지스님의 시봉을 들면서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밤마다 안마를 해드리고 때로는 목침 위에 올라서 종아리도 맞으면서 행자시절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총무스님께서 밖에 출타했다가 급한 일로 전화를 하셨는데 우리 행자들이 전화를 받지 못했다. 눈이 많이 와서 눈을 치우느라고 받지 못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았던 그날, 총무스님은 우리 다섯 명 모두에게‘엎드려 뻗쳐!’를 시켰다. 매타작으로 엉덩이가 터진 행자들은 공양간에 들어가 불을 때면서 훌쩍 대었다.

아마 그곳에서 계를 받았더라면 그 일은 행자시절 중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그 사건은 행자 만행을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대처스님을 따라다니던 행자 하나가 다가와 나를 구슬렸다.
“여기 살지 말고 다른 절로 가자. 다른데 좋은곳이 많거든.”
그 애는 내가 가장 만만해보였는지 나를 구슬렸다. 나이 열다섯이었으니 무슨 자기 주장이 있고 앞뒤 분별할 지혜가 있었겠는가. 급기야 저녁예불을 마치고 심야도주를 했다. 버스를 타면 스님에게 잡힐까 싶어 밤새 걸었다. 그 추운 겨울밤에 불빛이 보이면 옆으로 숨으면서 속초까지 걸어가 추위를 녹이느라 불을 쬐던 두 소년을 상상해보라.

신흥사에서 나와 법주사, 직지사를 거쳐 불국사로 가서야 비로소 행자생활을 제대로 하고 계를 받았으니, 그 모든 일이 전생사였던 것 같다. 그 아이와는 직지사를 나와 헤어졌는데, 몇 년 지나 동화사로 간 그 아이가 궁금해 동화사 스님에게 물어보니, 그는 그곳에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계를 받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반가워서 편지를 띄웠더니 답장이 왔다. 지금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출가 본사가 된 불국사에서는 나보다 세 살 더 먹은 행자와 함께 보냈다. 지금 불국사 주지이신 성타 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면서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지냈다. 당시 불국사엔 강원과 선원이 없었다.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자신이 알아서 해야 했다. 나는 새벽예불이 끝나고 나면 한자를 익히기 위해 삼천자문을 가져다놓고 외웠다. 반복해서 삼천자문을 다 익히고 해인강원으로 가서 치문을 배우는데 그렇게 수월할 수가 없었다. 한창 공부가 쏙쏙 머리에 들어올 때 누군가 붙잡아주었으면 체계있게 공부를 잘했을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살아오면서 두고두고 들었다. 방목이었다고 할까, 나의 어린 행자시절은 홀로 결정하고 홀로 나아가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국수공양을 했던 기억도 난다. 밀가루반죽을 해서 기계에 넣고 손으로 돌리면 면발이 굵은 국수가 빠져나오는 기계가 있었다. 가마솥에 기계에서 뺀 국수를 넣고 감자와 호박을 썰어 넣고 끓여서 모든 대중이 국수공양을 했다. 한창 인기리에 방영중이던‘여로’ 라는 연속극을 원주스님 방에서 보았던 일도 행자시절 추억의 한 장면이다.

7월 보름, 여름 결제 일주일을 앞두고 계를 받게 되었다. 은사도 정하지 못했는데 계를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여 당황했다. 당시 불국사 주지는 범행 스님이셨다. 범행스님은 틀도 좋으셨고 복도 많은 분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상호에 복이 있어 보였다.

행자들은 보통 그 절 주지스님의 상좌가 되는 게 관례였는데, 나는 당시 불국사 노전 소임을 보시던 노스님을 은사로 하게 되었다. 대구 어느 절에서 오신 노스님이셨는데 연세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좌가 없자, 노스님 시봉도 들 겸 그 분을 은사로 정하라는 주지스님의 명 때문이었다. 지금 같으면 내 의지를 냈겠지만 당시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은사스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계를 받았으니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람인가. 오조가사에 장삼을 맞추고 열여섯에 계를 받았으나 노스님은‘절 일 열심히 해라’하시는 정도 말고는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당시 정화 후의 풍토 탓인지 대부분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그랬던것같다.

나이 들어 생각하니 가장 수행자다운 스님은 뒷방에 살던 노스님들이셨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수행에 전념하시던 그분들이 지닌 힘이 불교를 면면히 이끌어가는 힘이고, 그분들의 원력이 사바세계 중생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가 부족하고 박덕한 탓에 그때는 그걸 몰라 노스님들 곁을 무심히 지나고 말았다.
생각난다. 계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향곡 스님과 춘성스님께서 불국사에 오셨다.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라고해서 삼배를 올렸더니 춘성 스님께서 말없이 죽비를 딱딱 치셨다. 공부인에게 내리신 무언의 법문이었으나 철없는 어린 사미가 어찌 알아들었겠는가. 언제나 큰스님들은 내게 너무 먼 존재였다. 그러나 잠깐이지만 격의없이 너무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셔서 잊지 못하는 노스님이 계시다.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종종 용탑선원에 계시던 고암 노스님을 찾아 뵈었다. 자비보살이셨던 스님은 어린 후학들을 볼 때마다‘이리 가까이 오너라’하시곤 손을 잡아주시면서‘열심히 공부해라. 고맙다’하셨다. 상좌의 신발이 더러우면 손수 닦아주시고 누구를 야단치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자네 왜 이러는가’하는 소리 한번 하지 않고 누구든 넓게 품어주셨던 그 따스한 온기가 지금까지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있다. 그 온기가 후학들에게‘공부를 해야겠다’는 발심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나이 들어 생각하니 노스님께선 시비분별을 놓아버린 분이셨다. 놓아버리면 누구든 끌어 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비심이라 하지않던가.

상당히 가난한 집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재물이라든가 명예에 대한 사무친 마음이 있을 법도 한데 도무지 어려서부터 나는 그런 것에 욕심이 없었다. 출가를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뭔가 이룬 것도 없고 내세울 만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때때로 전생에 인을 잘못심었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도 결코 크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 아닌, 다 놓아버린 삶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래서 어떤 사람, 어떤 존재든 내 판단으로 자를 대서 평가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이 세상 그 무엇도 무시할 존재는 없다. 모두 아름다운 존재다.

신도분들에게 주로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내 저울로 달지말라’는 것이다. 소중한 삶을 살기 위해 선 놓아버려야 한다. 놓고 비워버리지 않으면 인생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로 남는다. 놓아야 보이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취재, 글 /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