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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金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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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정담善雨情談 - 김선우 2008년 09월 319호
김선우 - 나는 춤이다 금고金鼓 / 김선우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올림픽 시즌이 돌아와도 데면데면한 편이지요. 이번 베이징 올림픽도 그랬습니다. 올림픽 때문에 베이징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먼저 떠 올랐습니다. 베이징의 대기 상태를 올림픽을 치를 만한 수준으로 바꾸기 위해 공장지대를 통째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거나, 나무 하나 없이 삭막하던 거리에 다른 지방에서 뽑아온 아름드리 나무들을 턱턱 심어대는 중국당국의‘하면 한다’는 추진력도 내게는 썩 마뜩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올림픽 기간 중 티베트에서 유혈사태가 있었다는 외신을 들었습니다. 아, 심장이 떨렸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려운 간극. 우리는 정말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되묻게 되더군요.
이런, 양궁 얘기를 하려다 길어졌습니다.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경기가 양궁인데요, 양궁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날그날의 날씨상황에 따라 궁수가 바람을 읽어야 한다는 것. 그건 다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테면 민감한 센서를 가진 컴퓨터나 전문가가 대신 알려줄 수 없는, 오직 현장에 두 발을 붙인 궁수 자신의 감각만으로 터득해야 하는 부분이지요. 바람을 읽고 일부러 과녁을 오조준해야 하는 경우가 때로 발생하고, 그때의 오조준은 과녁의 중심으로 가는 길이 기도하다는 것. 이것은 생의 아이러니를 문학적으로 비유하는 아포리즘 같기도 합니다.

좋은 궁수는 무아의 상태를 구현해야 합니다. 무아를 구현하려고 애쓰는 의지를 너머 자연스럽게 무아의 상태가 되었을 때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양궁경기를 눈여겨 보면서 알게 되었어요. 활 시위를 당길 때 선수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최고의 선수들도 긴장해서 눈을 깜빡거립니다. 그러나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바로 그 찰나, 눈 깜빡임이 딱 멎습니다. 좋은 선수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과녁을 보고 있는데 과녁 너머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화살의 온몸을 느끼면서 화살 이전의 상태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전율하지요. 아, 저것은 뭔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티브이 화면에 가까이 갑니다. 둥근 과녁의 중심. 저곳은 먼가.

함께 경기하는 선수가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양궁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상대가 있으되 상대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점수에 대한 욕심도 버리고, 오로지 과녁의 중심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해야 합니다. 방금 쏜 화살이 과녁의 중심에서 벗어나 8점이나 7점에 가 꽂혔다고 해도 흔들려선 안 됩니다. 시위를 놓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끝.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궁수는 새로 당길 화살과 과녁에 집중해야 합니다. 시위를 당기는 매순간 그저 최선을 다할 뿐. 이미 날아간 화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버려야 한다는 집착마저 버린 후, 그렇게 자유로워져야 하는 경기 입니다. 집착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시위를 놓는 순간의 슈팅밸런스를 만들기 힘들지요. 주어진 모든 화살을 첫 화살 같은 마음으로 쏘아야 합니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평정심. 표적과 자신만을 보아야 합니다. 응원석이 흥분해도 궁수는 고요해야 합니다.

금고 소리! 도량석과 아침 종송 후 법당에서 울리는 금고 소리를 들을 때면, 심장으로 무언가 날아와 박히는 듯 합니다. 과녁의 중심으로 놋쇠이슬이 떨어지듯 마음이 깨어납니다. 아, 나는 누군가. 정신이 번쩍 듭니다. 금고의 표면에 새겨진 동심원들이 궁수가 꿰뚫어야 할 과녁처럼 쨍쨍합니다. 그 쨍쨍함 속으로 오늘의 화살을 당깁니다.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 화살인, 맑고 차고 단단한 쇠북소리, 오늘 당신에게 전합니다.□

김선우 시인은 1996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칼럼집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어른이 읽는 동화 <바리공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