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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벗, 나의 사랑하는 분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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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이야기 - 최장근 2008년 09월 319호
나의 아름다운 벗, 나의 사랑하는 분신(들) 나의 아름다운 벗, 나의 사랑하는 분신(들)
최장근/극자가 겸 연출가

언제나 너는 그 높은 그곳에서 내가 가는 이 길 밝혀주고 내가 힘겨워하던 외로운 세상으로부터 너는 나를 지켜 강하게 하고 가슴 답답할 때면 밝은 아침이 되어 지쳐 잠이 들 때면 별빛으로 다가와 항상 나의 곁에 있는...
-정혜선의 노래<나의 하늘> 중에서 -

(1)

화가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은 절친한 동료 시인이자 작가이고 건축가였던 이 상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그에게 이 상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자 맘을 터놓고 예술적 영감을 교류할 수 있는 지음知音이고 지기知己였던 모양이다. 그림 속에서 이 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파리하게 웃고 있다. 그들은 일제 치하의 저 암울한 1930년대를 오로지 치열한 창작욕 하나만으로 버텨나갔다. 지칠 줄 모르는 질주. 그들은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서로가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존중하였다. 예술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벗이 곁에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자 지복至福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몰라 봐도 좋다, 내겐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아마도 구본웅과 이상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2)

그와 나는 일로 만났다. 그는 시를 쓰고 있었고 나는 희곡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잠시 함께 했던 문학라디오에서 그는 진행자였고 나는 작가 겸 프로듀서였다. 그와 나는 일로 만났지만 어쩌면 그 전에 글로 먼저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나 사이를 이어준 인연의 끈은 어느 잡지의 열혈독자가 건네준 한 마디 말일 수도 있고 소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작가이신 한선생과 관계된 만남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서로 농담처럼 주고 받았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말이 의미하듯 각자의 글 자체가 품고 있는 어떤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중심보다는 주변,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 강자보다는 약자에 더 애정이 기우는‘언니’같은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우리는 가끔, 아니 그보다는 자주 쨍쨍거리며 운다. 그 대부분은 내가 무심코 저지른 말과 행동에 자존심 강한 그가 상처를 입어서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하는 항변 속에는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무심한 벗에 대한 섭섭함과 야속함이 잔뜩 배어 있다. 화가 풀리지 않은 그의 목소리를 접할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어쩔줄 모르고 당황한다. 사소한 오해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동안 지속되는 냉전 기간은 어느 한쪽의 미안해하는 마음이 상대방에게 오롯하게 전해지는 한순간 마법의 힘처럼 스르르 풀리고 우리는 다시 언제 그랬냐는듯 스스럼없이 깔깔거린다.

어떤 날 전화기 너머로 건너오는 그의 목소리는 예상 밖으로 밝고 싱그럽다. 반 옥타브 높은‘라’음을 연상시키는 맑고 상큼한 그 음성엔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흔히 지니고 있을 법한 우울한 음색과는 거리가 먼 명랑 쾌활한 일상의 개인적인 그가 그대로 묻어난다. 기분이 좋을 때 경쾌한 파찰음을 내며 쨍 하고 갈라지는 하이 톤의 그의 웃음은 개구쟁이 소년이 제멋대로 부는 휘파람처럼 하늘 끝까지 팡팡 올라가기도 한다.

그는 분명하고 명확하며 단호하다. 그 앞에서는 어떤 어설픈 짓이나 행동도 쉽게 통하지 않을 것 같다.나는 그러나 날이 선 전사로서의 그 푸르고 선명한 이미지 속에 깃든 부드럽고 여린 사랑의 형상을 감촉한다. 삼라만상 온갖 것들을 넉넉하게 껴안으려는 더 깊고 너른 대지모의 품을 발견한다. 내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3)

우리가‘벗’이라고 부르는 친구의 유형은 참으로 다양하다. 국어사전에는 비슷한 또래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벗이라 밝혀놓은 것 외에 사람이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 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덧붙여 놓았다. 그러니까‘책은 내 평생의 벗’이라거나‘음악을 벗으로 삼아 휴일을 보냈다’거나‘자연을 벗삼아 시골에서 지낸다’는 문장들이 생겨났으리라. 옛 선인들의 가작, 가령 윤선도의 <오우가>나 정약용의 <죽란시사첩>들도 이로부터 탄생했을 것이다.불가에서는 함께 정진하는 벗을‘도반’이라는 말로 존중해주고 속세에서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는 벗은‘동지’라는 이름으로 맺어져 있다. 그런가하면 긴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반려자로서의 벗에게는‘배우자’라는 멋진 호칭이 부여되기도 한다. 또 영혼을 교감하는 아주 절친한 벗을 가리켜‘솔메이트 soulmate’로 명명하기도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벗의 존재를 가리켜‘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것은 문명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그들만의 오래된 공동체 사회에서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삶의 지혜와 전통에서 비롯된 개념일 것이다.

‘벗’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말들은‘가족’이나‘인연’,‘함께’,‘ 일상’,‘ 여행’,‘ 추억’,‘ 고향’같은 단어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결국 나중에 돌아가 자신
의 머리를 눕힐 곳도 바로 그런 가족이나 고향 같은 벗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벗’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숙명처럼 따라붙는 근원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환기시킨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저 가슴 깊숙한 곳에 고이고이 묻어두고 있는 인류의 보편적 자산이자 무형의 유산 같은 것 혹은 신화의 세계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본질적인 상징과도 같은 것 말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제가는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은 곤궁할 때 사귄 벗이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가난을 상의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의 구멍 난 가슴을 보듬어 안아주고 그 아픔과 상처에 새 살이 돋게끔 위로하고 격려하는 든든한 나의 분신들, 언제나 변함없는‘희망’이고‘믿음’이고‘사랑’이어서 언젠간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사람, 바로 그가‘나의 아름다운 벗’이다.□


<법보시 하셨습니다(8월)>

부산 우복자 30,000원
김희진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