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반 道伴 - 첫 철의 추억
산사의 여름은 물옥잠화이다. 푸르른 수목과 물소리 새소리가 맑은 허공 속에 경쾌하게 둥둥 떠 있다. 게다가 구름이 산 위로 그림자를 드리울 때면 돌샘(石井)엔‘기억’이란 무늬가 떠오른다. 스님들의 기억은 언제나 출가할 당시와 첫 철을 나던 시절에서부터 그 무늬가 엮어진다. 나의 첫 철의 추억과 그때의 도반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87년 2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미계를 받은 후 은사스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한 800일 기도를 회향하자마자 꿈에도 그리던 선방으로 발길을 향했다. 남행열차를 타고 동대구역까지와서 가은加恩행 버스를 갈아타니 마음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되었다. 큰 바다에서 놀던 연어가 회유回遊의 길을 따라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 나는 그렇게 봉암사를 향해 끌려갔다. 87년 2월의 봉암사는 빛이 바랜 흑백사진속의 풍경이었다. 혼을 때리는 맵싸한 계곡 바람이 도량을 횡 하니 쓸고 지나가면 태산 같은 정적이 온 산중을 얼어붙게 하고, 밤이 되어 객실에 불을 밝히면 객스님은 망망 대해에 외로운 등불을 밝힌 일엽편주가 되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객실에 붙어살다가 어느 날 산철의 본방에 입실이 허락되었다. 그때의 기쁨이란 대학교 합격 소식에 비할 수 있으랴. 다각실에서 대중 스님들께 첫 인사를 드리니 선견禪見스님이 작설차를 진하게 빼서 한 잔 주신다. 이것이 나의 지대방 신고식이요, 다선茶禪의 입문이었던 셈이다.
그분은 맑은 얼굴에 차를 닮은 풍모를 지니셨다. 잠을 맑게 자고 정신을 깨어 있게 하기 위해서 차를 애용하신다고 하였다. 그분은 결가부좌에 장좌불와를 주장하셨다. 나와 같은 또래의 스님들은 그분을 소위‘결가부좌파’의 조실로 모셨다. 하안거가 시작된 어느 날 산 속으로 포행을 나갔다가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수 있는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맨땅 위에 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판자를 얹어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든 자리에서 24시간 줄곧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스님! 그가 유명한‘야전수좌’정오스님이었다. 나는 존경하는 마음이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그 스님을 닮으려고 애를 썼다. 초발심의 광기에 불이 붙은 초심납자들은 본방을 깨고 나와 누각에서 용맹정진을 감행하였다. 물론 결가부좌파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다. 선방의 규칙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그러나 수좌가 정진을 더 많이 하겠다는 뜻을 가상히 여겨서 본방에서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으셨다. 입승을 보셨던 상현相現스님, 단아한 침묵으로 대중을 이끌어 가셨던 그분의 인품은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나도 그분과 같은 모습의 고참납자로 남기를 원한다.
기억난다. 어느 날 허름한 동방아를 걸친 한 객스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 스님이 묻기를“어디서 오는가?”객스님 왈“허공산 무착사虛空山無着寺!”. 우리는 모두 숙연해졌다. 그분이 기성奇星스님이었다. 내가 결가부좌를 고집하는 것을 보고“소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하나 마차를 때려야 하나?”하시며 좌상坐相에 집착하는 나를 은근히 경책하셨는데 신심이 뻗친 내 귀에는 들어올 리 없었다. 둥실한 얼굴의 일진 스님과는 숙세의 인연을 다시 만난 듯 방선만 하면 오소리와 다람쥐가 되어 산속 길을 누비고 다녔다. 참선과 지성과의 관계, 수행과 사회참여, 폐쇄된 집단의식과 열린 지평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대화를 나누었던 인연은 오늘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아직도 현역 수좌로 선방을 지키고 있다.
운암 스님! 평생을 희양산에 묻고 묵언을 실천하셨던 누더기 수좌! 우수가 담긴 깊은 눈빛에 자비로운 마음씨를 가지셨던 분, 바느질 솜씨가 좋아 자신의 누비를 직접 만들어 입는데 누군가가‘참 좋아 보인다’는 말을 하면 그 즉시 벗어서 주어버리니, 우리는 그런 말을 삼가야 했다.
내가 봉암사를 떠나 제방을 유력하면서도 운암 스님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남아 있었는데, 어느 날 지대방 소식에 전해 들으니, 묵언을 너무 오랫동안 하여서 아예 말을 못하게 되었다느니, 다시 말을 배우려고 발성 연습을 했다느니,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 다른 대중 스님들이 강제로 퇴방시켰다느니 한다. 어린 시절의 순진했던 소꿉동무를 잃어버린 느낌이다. 아,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별을 헤고 있을까?
혜담 스님, 산중의 신사요, 학鶴같은 누더기 납자였다. 은사에게 물려받아 30년이 된 누더기를 깁고 기워 깨끗이 빨아 입고 다니셨으니 학의 깃털처럼 눈부셨다. 인적 없는 깊은 바윗골에 앉아 방울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삼매에 들고 흐르는 물가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를 즐기셨다. 누군가가 해제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자 하니까 스님께선“그대가 무슨 수로 내 모습을 찍을 수 있으리오?”라시며 일할 하셨다.
그 후에 님의 소식을 들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토굴에 은거하고 있다고 한다. 청산에 뛰어놀던 사슴 같고, 계곡에서 포효하는 호랑이 같던 수좌들이 무상한 세월 앞에서 하나 둘 사라져간다. 출가하기 전에 인연 맺었던 불교학생회와 대불련의 동지들도 도반으로 생각된다. 80년의 봄 캠퍼스에 타올랐던 민주화의 대행진 가운데서 학생운동의 주류들은 불교는 역사의식이 빈곤하며, 사회참여에 소극적이어서 사회변혁세력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 혼돈의 시기에 대학생불자의 대표를 맡았던 나는 500자루의 창에 옆구리를 찔린 듯한 아픔을 느끼며 불교를 변호하였고, 대학생불자의 의식화와 개혁세력화에 온몸을 던졌다.
그 풍운의 시절을 같이 호흡했던 의식화 그룹의 선배 신상진(성남시민연대의 리더를 맡았다가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있다고 한다)과 김기호(현재는 부산대 의대교수로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지였던 박상필(BBS의 PD로 정진중이라 한다)님이시여, 천천히 걸으며 물소리를 밟아 끊으소서. 중천에 떠 있는 달을 통해 마음을 전합니다.
그렇게 80년의 봄을 짓밟히고 난 후 불교학생회는 밀양 표충사 내원암으로 여름 수련회를 갔다. 허우성선배(지금 경희대 철학교수로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와 전재성 선배(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을 맡고 계시며 근본경전의 번역을 집대성하고 계신다)를 모시고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발원하였으며, 불교적 삶을 살기로 맹세했었다. 그날의 맹세는 아직도 풋풋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거침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수레바퀴 밑에서
한 송이 꽃을 피우려했던
순진했던 우리, 아, 보고 싶은 얼굴들
저 인간들의 그물 속에서 밀고 당기며
진실은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이제 한 자루의 촛물이 밝혀주는 공간에서
한 이불 밑으로 흘러드는 꿈이 되어
만나고 싶지만
우리는 묵묵히 자기의 길
-보행원의 길을 갈 뿐이다.